은퇴하는 '세계 위기관리자' 메르켈…그 없는 EU 어디로

이원영 / 2021-06-07 14:25:02
과감하고 포용력 있는 정치로 세계적 영향력
오는 9월 16년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나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앙겔라 메르켈(67) 독일총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당신이 (휴가 때마다) 항상 같은 옷만 입고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다른 옷이 없나요?"

메르켈 총리가 대답했다. "나는 모델이 아니라 공무원입니다."

또 다른 회견에서 기자가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가사 도우미가 있냐"고 물었다.

메르켈은 "아니요, 저는 그런 도우미는 없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집에서 남편과 저는 매일 이 일들을 우리끼리 합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우리 정부의 일의 성과와 실패에 대해 질문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메르켈 총리의 소탈한 면모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글의 일부다. 어느 러시아인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너무 다른 메르켈 총리를 칭송하며 올린 글로 알려져 있다.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3월23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16개 주 총리들과의 회담 후 기자회견하고 있다. [AP 뉴시스]

'세계인의 지도자' '정상이 존경하는 정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지난 16년 간 독일을 이끌어온 메르켈 총리가 9월 정계를 떠난다. 9월로 예정된 총선에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퇴임을 석달 정도 앞두고 있지만 독일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는 그의 공백을 벌써부터 아쉬워하는 분위기다.

이코노미스트는 "메르켈이 퇴임을 준비하면서 독일 국내정치가 혼돈에 빠질 수도 있다"며 그의 퇴임 이후 독일과 유럽연합(EU)의 정치적 공백을 우려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마지막 독·불 내각 회의체 회의를 마친 뒤 "아직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당신의 적극성, 실행 능력, 인내심, 경청 능력은 양국 간의 관계와 유럽을 위해 결정적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메르켈 총리는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부문에서 한 번(2010년, 미셸 오바마)만 제외하고 2006~2015년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대했다. 재임 기간 숱한 위기 상황에서도 특유의 침착함과 과단성으로 '유럽의 병자' 소리를 듣던 독일을 경제대국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아울러 받고 있다.

메르켈에게는 '엄마(무티) 리더십'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양 극단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화합을 이끌어내는 그의 정치력에 붙은 찬사다. 그가 속한 보수 기민당은 2005년 총선에서 1당이 되었지만 단독정부 수립에 필요한 과반을 얻지 못해 정치성향이 전혀 다른 사민당과 연정을 하며 첫 총리를 시작했다.

이후 그의 정치 이력은 이념과 정파를 떠나 연정을 거듭하면서 포용의 정치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한국 정치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대타협의 정치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메르켈은 재임 기간 숱한 위기에 직면했지만 고비마다 '엄마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리스 파산 위기를 맞아 유럽국들을 설득해 구제금융 승인을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발휘했고,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에 직면해서는 국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를 호소하며 과감한 수용정책을 폈다.

브렉시트, 코로나19로 유럽연합(EU) 해체 위기까지 몰렸던 지난해 메르켈 총리는 5000억 유로(약 670조 원) 규모의 유럽부흥기금을 조성해 EU를 한데 묶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메르켈 총리는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에 깃발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각을 세우며 자유무역의 선도자임을 자임했다. 그는 트럼프의 미국일방주의에 선명한 반대 신호를 보내면서 EU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위상을 얻었다.

독일의 첫 여성총리, 동독 출신의 첫 독일 총리, 역대 최연소 장관 및 총리라는 타이틀을 쥔 그는 CNN의 표현대로 '전 세계의 위기 관리자'였다.

▲37세 때인 1991년 헬무트 콜 총리 정부에서 최연소 장관(여성청소년부)으로 발탁됐을 당시 앙헬라 메르켈 모습.[루벤디게스 박물관 사이트 캡처]

물리학을 공부한 지적 배경이 그 특유의 침착함과 절제, 평정심과 인내심, 고도의 집중력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9월 총선에서 이변이 없는 한 아르민 라셰트 기민당 대표가 차기 총리가 될 것이 유력시된다.

독일 국민들과 유럽 정계는 차기 총리가 메르켈과 얼마나 닮은 정치를 하느냐에 그의 성적표가 달렸다고 말할 정도다. '메르켈 없는' EU의 운명에도 국제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위의 온라인 글에도 소개되었듯 '엄마' 메르켈은 총리가 되기 전부터 살고 있는 서민 아파트에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공짜 전기를 쓸 수 있는 밤에 세탁기를 돌릴 것이다. 물론 옆집에 소음이 나지 않도록 방음설비는 완벽하게 해뒀다.

K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원영

이원영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