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복의 타박타박 지구촌] 역사의 아픔마저 남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다

UPI뉴스 / 2019-07-13 10:06:39
- 페루 쿠스코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안데스산맥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태평양 쪽으로 상당히 치우쳐 뻗쳐 내려가 자연스럽게 페루와 브라질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산맥 오른쪽 삼각형 모양의 광대한 부분은 아마존 정글이 차지하고 있다. 페루는 안데스산맥이 펼쳐 놓은 골짜기에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곳이 바로 잉카제국의 영광과 몰락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쿠스코와 마추픽추다. 두 곳 모두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쿠스코 시내 전경. [셔터스톡]


이곳에 가려면 무엇보다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해발 2500m에서 3400m에 이르는 높은 곳에서 움직이게 되므로 정도는 달라도 누구나 고산병 증세를 겪기 때문이다. 더욱이 버스로 갈 경우 어디서 출발해도 꼬불꼬불한 산길을 10시간 넘게 밤새 시달려야 하므로 자칫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다가 탈진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먼저 쿠스코(Cusco)로 들어간다.

잉카제국 영광 간직한 남미 최대 관광명소


쿠스코는 안데스산맥 우르밤바 계곡 해발 3400m 높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남아메리카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일구면서 번영을 누린 잉카제국의 옛 수도다. 쿠스코는 ‘배꼽’이라는 뜻으로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임을 내세운 것이라고 한다. 한 해 2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남미 최대의 관광명소다.


쿠스코의 중심은 다른 남미 도시처럼 역시 아르마스 광장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31년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뒤 잉카인이 세운 건물들을 부수고 그 초석 위에 자신의 교회와 저택을 세웠다. 그래서 오늘날 중세 유럽 도시의 모습과 잉카의 흔적이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분위기가 얄궂게도 외부인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매력이 되고 있다. 


대성당은 잉카의 지배자 비라코차(Viracocha)의 신전인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1559년부터 1654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지어졌다. 식민지 시대 대표 건물로 예술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대성당 안에는 은 300톤을 들여 만든 주 제단을 비롯해 각종 예술품이 많이 있다. 이 가운데 이곳 출신 화가인 마르코스 사파타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유명하다. 그림에는 중앙의 큰 접시에 전통 음식인 쿠이(어린 기니피그 요리)가 놓여 있고 잔에도 와인 대신 옥수수로 만든 치차가 담겨 있다. 예술품 중에는 흑인 예수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 향과 촛불의 그을음 탓에 색깔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는 잉카제국 11대 왕 와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이었던 ‘아마루칸차(Amarucancha)’ 위에 세워진 것으로 외관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을 띠고 있다. 내부에는 역시 사파타와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조각품 등 볼거리가 많다. 산토도밍고 교회는 태양의 신전이었던 ‘코리칸차(Qorikancha)’를 허물고 세웠다. 코리는 ‘황금’, 칸차는 ‘울타리’를 뜻하듯이 원래 석벽과 주변에 폭이 20cm가 넘는 황금 띠가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황금은 스페인 사람들이 뜯어가 버려 남아 있지 않다. 산토도밍고 교회가 건설된 뒤 1650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교회 건물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잉카시대 때 만든 초석은 별 영향을 입지 않아 석조기술의 우수성을 증명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교회 건물은 메르세드 교회다. 


1650년 지진에 무너졌다가 1680년 무렵 복원된 곳으로 유럽 양식의 내부 회랑이 아름답다. 한편 잉카의 석조기술을 보여주는 또 다른 유적으로는 아르마스 광장 한쪽 골목에 있는 12각돌을 꼽는다. 접착제 없이 빈틈없게 돌을 이은 모습을 보면 역시 대단한 솜씨라는 생각이 든다.

계곡 곳곳에 흩어진 유적지…과거 모습은 짐작만


쿠스코는 도시뿐 아니라 근교에도 찾아갈 곳이 많다. ‘잉카의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 de los Incas)’이라고 부르는 지역 곳곳에 있는 이 유적지들도 스페인의 침략 때 대부분 훼손되어 과거의 모습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현지 가이드는 직업에서 오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스페인 단체 관광객의 안내를 맡아 유적지를 설명 하다 보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흥분한 나머지 실랑이까지 벌이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하긴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후회스러운 역사를 남겨준 장본인들을 마주하고서 평정을 지키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 삭사이와만 유적지.

 
해발 3700m에 있는 삭사이와만(Sacsayhuman)은 15세기 후반 잉카 9대 왕 파차쿠텍(Pachacutec)이 시작해 10대 왕 투팍 유판키(Tupaq Yupanki)이 완성했다. 퓨마를 숭배한 잉카인은 쿠스코 도시를 퓨마 모양으로 만들고 그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이 유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쓰임새는 종교시설인지 군사 목적의 요새인지 확실하지 않다. 큰 바위를 쌓은 벽이 갈지자형으로 3층까지 연결되어 길이가 360m에 이른다. 그 돌들 중에서 제일 큰 것은 높이 9m, 무게 약 350톤에 달한다고 한다. 한쪽에 유적을 걷어내고 예수상을 세운 전망대가 있는데, 아래쪽 쿠스코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해마다 6월 24일엔 남미 최대 축제 중 하나인 태양제 ‘인티라이미(Inti Ryimi)’가 열리는데 아르마스 광장에서 시작한 행렬이 이곳까지 이어진다.


▲ 작은 사진은 잉카의 석조기술을 보여주는 12각돌.


켄코(Qenqo) 거대한 자연석들을 그대로 깎은 것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유적지로 희생물을 바치고 왕이나 귀족들을 미라로 만들던 성스러운 장소다. 푸카푸카라(Pukapukara)는 쿠스코의 북쪽에 있는 군사시설로 쿠스코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곳이다. 탐보 마차이(Tambo Machay)는 4단계의 단을 갖춘 신전으로 셋째 단에서 항상 같은 양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어 ‘성스러운 샘’이라고 부른다. 잉카 왕과 주술사가 와서 풍년을 위해 신탁을 받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피사크(Pisaq)는 민예품을 파는 인디오 마켓이 열리는 작은 마을이다. 산 위에 잉카시대 때 지어진 석조건물과 계단식 농경지를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주로 흰옥수수를 심었다. 흰옥수수는 왕족의 식량이나 태양신에게 바치는 음식으로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농경지를 계단식으로 조성한 것은 자연을 보존하고 존중하기 위해 산세를 그대로 지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얀타이 탐보…잉카 트레일 나서는 출발지


쿠스코 근교에서 잉카시대 때 마을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오얀타이 탐보(Ollantay Tambo)다. 돌로 만든 길과 벽, 수로 등이 모두 옛날 그대로다. 이곳은 옛 잉카인이 여러 마을을 오갈 때 다녔던 길을 걷는 잉카 트레일의 출발지점이며,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가는 기차를 타는 곳이기도 해서 항상 사람들이 몰려 제법 번잡하다. 유적지로 들어가면 거대한 돌산과 계단 등이 있는데 이 또한 태양신 ‘비라코차’를 비롯해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시설로 밝혀졌다. 


▲ 염색하는 법을 보여주는 친체로 마을의 부인.


특징적인 풍광을 간직한 곳으로는 소금 광산 살리네라스(Salineras)를 뺄 수 없다. 해발 3300m 산골짜기 비탈에 있는 이곳은 잉카시대 이전부터 소금을 생산해 온, 1000년이 더 된 페루의 마지막 소금 광산이다. 물이 흐르면서 광물질인 암염을 녹이고, 그 소금물을 계단식 논으로 만든 곳에 가둬 소금을 만든다. 현재도 옛날 방식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3000개가 넘는 염전은 정부 소유가 아니라 주민들 것이다. 동심원 형태의 계단으로 이뤄진 모라이(Moray)는 농경지의 일종이다. 해발 3500m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아래와 위의 온도차가 5도까지 난다. 그 결과 위쪽과 아래쪽에서 재배하는 식물도 달라져 품종을 연구하거나 온실로 활용하는 등 용도도 다양하다. 


잉카시대 때 지은 견고한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친체로(Chinchero) 마을은 페루 전통의 직조물 생산지로 유명하다. 특별히 지정을 받은 집에서 알파카, 야마, 양 등의 털을 염색하는 방법과 실을 잣아 베를 짜는 법을 보여주고, 한쪽에는 완성된 제품을 진열해 놓고 판매도 한다.
쿠스코 주변을 돌다보면 옛 잉카제국이 영향력을 발휘한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다. 

 

이곳을 떠나며 내려다본 도심의 주홍색 지붕들이 다소 칙칙해 보이는 것은 이제는 사라진 그 영광에 대한 애잔함 때문이었을까.


글·사진 남인복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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