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파타고니아. 이름만 들어도 끝없이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여행자의 마음이나 자세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건 날씨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바람은 좀 색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가볍게 볼을 스치는 산들바람부터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기의 일렁임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그래서 바람이 몸에 감겨오는 것을 느끼면 왠지 모르게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둘러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파타고니아 여행 시기는 여름인 10월부터 3월까지다.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기온이 너무 떨어져 대중 교통수단이 대부분 끊기므로 다니기 어렵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성수기에도 편하게 둘러보기란 쉽지 않다. '살아있는 바람의 나라'라고 일컬어질 만큼 널뛰듯 하는 바람이 순조로운 일정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 남위 40도 이남 110만㎢에 달하는 넓은 땅을 일컫는 파타고니아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지역으로 나뉜다. 대륙 아래로 달리던 안데스 산맥이 아르헨티나 멘도사 부근에 최고봉 아콩가구아(6962m)를 솟구치게 한 뒤 계속 뻗어 내려 피츠로이, 세로 토레 등 험준한 봉우리들을 남겨 놓았으며, 광활한 초원에는 황량함이 무색하게 갖가지 동물들이 뛰놀고 있다. 또한 피오르 해안을 장식하고 있는 파란빛을 띤 빙하는 무채색 산봉우리들이 둘러싼 풍경에 색다른 빛을 더한다. 대륙의 크기가 남다른 만큼 한 가지만 꼭 집어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 대자연의 압도적인 위력을 눈앞에 마주함으로써 그야말로 지구의 끝에 다다른 듯한 착각도 하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꽂혀 있는 국립공원 팻말은 이곳을 찾아야할 이유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만년설 덮인 오소르노 화산의 강렬한 인상
먼저 빈센트 페레스 로살레스(Vincente Pérez Rosales) 국립공원은 작은 항구 도시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를 거쳐서 간다. 이곳은 칠레에서 제일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가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오소르노(Osorno) 화산(2652m)이 대표적인 볼거리다. 검은색 화산재에 새하얀 눈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도 비교적 잘 조성되어 있어 잠시 올라갈 수도 있다. 또한 빙하가 녹은 물이 녹색빛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페트로우에(Petrohue) 폭포와 토도 로스 산토스(Todo los Santos) 호수를 보게 된다.
이제 파타고니아의 대표 명소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Torres del Paine)로 발길을 옮긴다. 먼저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에 들렀다가 다시 푸에르토나탈레스(Puerto Natales)까지 가야 한다. 푼타아레나스는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2200km 떨어진 마젤란 해협에 있는 곳으로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를 제외하면 세계 최남단 도시다. 1520년 마젤란이 이끄는 탐험대가 해협을 발견한 뒤 대형선박들이 이곳(마젤란 해협)으로 다니게 되면서 파나나 운하 개통 전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중간 연락기항지로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따라 도시는 번영을 누렸으나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한 뒤로는 다시 한적한 마을로 돌아왔다. 여행자들 역시 여정에 따라 공항을 잠깐 이용하곤 다시 푸에르토나탈레스로 이동한다.
푸에르토나탈레스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도시로 각종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슈퍼마켓과 PC방, 기념품 가게, 여행사들이 몰려 있다. 그래서 단기 여행자는 물론 트레킹을 준비하는 사람과 다녀온 사람들로 항상 북적인다.
산·들판·호수·빙하 등 자연의 매력 품은 '절경'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1200만 년 전 지각 변동과 빙하의 침식이 일어나면서 생채기마냥 독특한 모양을 남긴 것이 소중한 '자연의 선물'로 되었다. 일 년에 대략 25만 명이 찾고 있는데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다. 토레(Torre)는 스페인어로 '탑'을 뜻하고, 파이네(Paine)는 파타고니아 원주민 언어로 '파란색'을 의미한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되고, 그 사이로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빙하가 간간이 눈에 들어오고, 그 빙하가 녹아내려 형성된 호수가 다채로운 색깔을 자랑하고 있다. 달리는 차에서 바라보면 왠지 하늘은 아주 낮게 내려앉아 있고, 구름은 더욱 오묘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드넓은 하늘을 캔버스 삼아 즉석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날씨다. 이처럼 신비로움과 매력이 넘치는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으려면 그야말로 화창한 날씨가 받쳐줘야 하는데,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워 강풍을 동반한 갑작스런 비와 눈을 만나는 일이 아주 흔하다.
대체로 푸에르토나탈레스에서 출발하는 일일투어로 돌아보게 되는데, 곳곳에 있는 전망대에 내려주므로 잠깐씩 걸을 수도 있다. 걸을 때도 가장 힘든 것은 바람이다. 그 세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 젖히는 바람에 모자도 쓸 수 없고, 머리가 제멋대로 날려 눈앞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산을 돌 때마다 푸른빛, 에메랄드빛, 회색빛 등 다양한 색깔의 호수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곤 해서 뜻밖의 광경에 한껏 빠져들기도 한다. 노르덴쇨드(Nordenskjöld) 전망대는 이곳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쿠에르노스 델 파이네(Cuernos del Paine), 몬테 알미란테 니에토(Monte Almirante Nieto) 등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또한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그란데 폭포는 그다지 크진 않지만 빛깔이 아름답고 수량이 풍부해 물이 흘러내리는 기세가 제법 거세고, 흘러내린 그 물은 페오에 호수로 들어가 호수의 물을 더욱 황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으뜸가는 구경거리는 그레이 호수와 그곳에 떠 있는 그레이 빙하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장애물은 바람이다. 호젓한 산길을 걸을 때만 해도 어떻게 호수가 있고, 빙하가 있을까 의아해 했는데, 멀리 굵은 모래가 깔린 호숫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쪽으로 발을 내디디자 다시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호수에도 물결이 거세게 일고, 빙하를 보러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그러다 멀리 거무튀튀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한 호수 위에 파르스름한 보석이 빛을 내듯 물체가 눈길을 끈다. 색상의 대비가 너무 뚜렷해 마치 누가 장난감을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만 같다. 조그만 빙하가 연출하는 사뭇 신비롭고 재미있는 풍광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다가서게 만들지만 방향도 없이 불어 닥치는 세찬 바람에 쫓겨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설 수밖에 없다.
감춰진 비경 보려면 사흘 이상 트레킹 나서야
이처럼 사람을 홀리게 하는 비경(秘境)이 가득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제대로 보려면 아무래도 트레킹에 나서야 한다. 트레킹 코스는 3박 4일짜리 W코스와 6박 7일짜리 순환코스가 있다. W코스는 W자 모양으로 이어진 코스를 따라 걷는 것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트레킹을 하면 겹겹이 둘러싼 산에 가려 볼 수 없었던 3개의 토레(탑)인 다고스티니(d'Agostini), 센트랄(Central), 몬시노(Monzino)를 다 볼 수 있고, 빙하에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관광투어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자연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트레킹을 할 때도 가장 큰 문제는 바람인데, 특히 W코스에서는 바람을 등지고 다녀야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불조심을 해야 한다. 여행자들의 실수로 삼림을 태운 일이 많기 때문이다. 1985년 한 관광객의 실수로 페오에 호수 주변의 땅을 태운 것을 비롯해 2005년 체코 배낭여행객이 낸 불이 열흘이나 타올라 176㎢를 태웠으며, 2011년 12월부터 2012년 1월까지 이스라엘인이 낸 불로 150㎢의 숲이 재로 변했다. 이에 대해 체코와 이스라엘 정부는 복원 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공원 안내소에는 이스라엘 정부의 사과문이 게재되어 있기도 했으며, 투어 안내인도 거듭해서 불조심을 강조했다.
이처럼 파타고니아에는 산, 들판, 강, 호수, 바다, 빙하까지 자연이 보여 줄 수 있는 온갖 것을 망라하고 있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50' '10대 절경' '종합선물' '걸작' '10대 낙원' 등과 같은 찬사를 듣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1978년 이 대단한 자연을 오래 보기 위해 생물 다양성 보존 지구로 지정하기도 했다.
글·사진 남인복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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