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복의 타박타박 지구촌]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두 얼굴의 도시'

UPI뉴스 / 2019-06-30 11:01:29
- 페루 리마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남아메리카를 여행할 때는 대체로 페루에서 시작하게 된다. 드넓은 대륙의 남쪽을 향해 차례대로 내려가는 일정을 짜기가 쉬워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마추픽추라는 대표 관광지가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낯선 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페루를 향해 떠났을 땐 설렘과 함께 알지 못할 걱정스러움도 느꼈던 게 사실이다. 번성했던 거대 제국이 외세의 침략에 한순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비운의 역사에 현재는 그다지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라는 개인적 생각이 겹쳐진 탓인지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 아르마스 광장. 대성당이 보인다.


페루에서 보낸 시간은 이런 걱정을 기우로 만들었다. 처음 만난 리마는 건물들이 지닌 은은한 파스텔톤 색상 때문인지 무척 차분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전형적인 페루 특산품이 보여주는 원색의 화려함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어서 오히려 어리둥절함마저 느꼈다. 더욱이 깊은 눈매와 주변에 서린 서늘한 기운이 한(恨)을 품은 듯한 원주민들의 얼굴이 우리와 몹시도 닮아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척을 만난 듯 애틋한 마음마저 갖게 한다.

12세기 잉카제국의 숨결이 살아있는 나라


페루는 국토면적이 한국의 13배나 되는, 남아메리카에서 셋째로 큰 나라다. 서쪽으로 태평양을 마주하고 내륙은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우림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12세기에 번영했던 거대 잉카제국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11세기 말 중부 안데스 지역에 나타난 잉카족은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에콰도르·볼리비아·칠레를 아우르는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찬란한 황금문명을 꽃피웠다. 


잉카는 케추아어로 ‘왕’이라는 뜻이며, 어원은 인팁 추린(Intip Churin), ‘태양의 아들’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잉카제국도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침략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532년 스페인에 의해 몰락함으로써 식민지가 되고 만다. 그 뒤 1821년에 군대를 이끈 산마르틴(San Martin) 장군이 독립을 쟁취한 뒤 군정을 거쳐 1980년에는 민정체제가 들어섰다. 1990년 일본계 후지모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치 경제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으나 대통령이 얽힌 각종 부정과 비리가 드러나면서 사회적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후지모리는 현재 복역 중이다. 


수도 리마는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5년 1월 18일 쿠스코 대신 수도로 건설했으며,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페루 부왕령(스페인 국왕을 대신해 부왕이 다스리는 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리마에는 대략 850만 명(전체 인구의 30%)이 거주하고 있으며 유입 인구가 계속 늘고 있어 대도시가 지니는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리막강(Rio Rimac) 너머 산크리스토발 언덕 쪽으로 몰려있는 빈민촌에는 걸어서 가지 말라는 당부를 듣기도 한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리마는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그야말로 ‘두 얼굴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볼 수 있다. 구시가지인 센트로 지역은 아르마스 광장(마요르 광장으로도 부름)이 중심이다. 광장 주변에 있는 대통령궁과 대성당, 수도원 등 옛 건물들은 스페인이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을 허물고 세운 것들로 유럽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역사의 곡절은 어떻든 간에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리마 도심의 라 우니온 거리.


가장 눈에 띄는 대성당은 1555년에 지어져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데, 피사로가 직접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1746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된 뒤 1755년에 다시 세웠다. 1541년 정적에게 피살된 피사로의 시신이 육중한 석관에 담겨 있다.


산프란시스코 성당과 수도원은 대성당보다 규모는 작지만 독특한 외양이 눈길을 끌고 오래된 유물도 많은 데다 지하무덤인 카타콤(Catacombs)도 있어 들러볼 만하다. 그런데 성당에 들어서면 마당과 건물 곳곳에 비둘기가 유난히 많아 놀라는데, 생전에 새를 좋아했던 프란시스코 성인의 이름이 붙은 성당이라 그렇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카타콤은 천장이 낮고 미로처럼 이어져 다닐 때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둑한 곳에 해골과 뼈를 쌓아놓은 것을 보면 다소 섬뜩해지기도 한다. 리마 시민이 무덤으로 사용했기에 현재 약 7만 명을 헤아리는 유골이 있다고 한다. 또한, 산토도밍고 교회와 수도원도 유명한데, 교회는 1549년, 수도원은 1603년에 지어졌다. 수도원은 남부 스페인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스페인산 청색 타일로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리마의 수호신이라 부르는 대성자 2명의 유골도 이곳에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대통령궁은 피사로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라 ‘피사로의 집’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건물은 1938년에 현대식으로 개축한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11시 45분에 열리는 근위대 교대식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본 뒤 리마의 최대 번화가인 라 우니온(La Unión) 거리를 따라 내려간다. 보행자 전용 거리로 길가에 늘어선 식당, 가게, 카페가 저마다 개성 있는 색깔을 뽐내고 있다. 거리의 끝은 산마르틴 광장에 닿는다. 광장은 자그마하지만, 중앙에 페루의 독립영웅 산마르틴 장군의 동상이 서 있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차이나타운에는 어느 도시나 그렇듯 비교적 싼 값에 푸짐한 양으로 부담 없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중국집이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에는 거리 바닥에 12지신의 동물을 순서대로 그려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저녁에는 분수공원(Parque De La Reserva)으로 저녁 나들이를 간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큰 분수공원으로 분수가 13개나 있다. 세 차례 갖는 30분 정도 분수쇼는 대표적인 볼거리로 가족 나들이객은 물론 페루를 찾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쇼핑몰 라르코마르에서 태평양과 마주하다


이제 리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신시가지 미라 플로레스(Mira Flores)로 넘어가 보자. 해안을 따라 조성된 신시가지는 바다를 보며 우뚝 선 빌딩, 호텔, 아파트 등이 줄을 잇고 있어 다른 현대 도시와 판박이 모습이다. 그중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해안 절벽을 깎아 만든 현대식 복합쇼핑몰 라르코마르(Larcomar)다. 1998년에 문을 연 이곳은 어느 곳에서나 바다가 보이도록 지어져 눈 앞에 펼쳐지는 거칠 것 없는 전망과 마주하면 그냥 마음이 시원해진다. 고급 식당과 다국적 레스토랑 체인점, 민예품 등 각종 상점과 푸드몰에 영화관과 볼링장 등 놀이 공간도 있어 맘껏 시간을 보낼 수 있다.


▲ 사랑의 공원. 연인의 동상 이름도 ‘키스’.


해안 길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절벽 위에 작은 테마공원인 ‘사랑의 공원(Parque del Amor)’이다. 두 연인이 과감하게 ‘키스(El Beso)’하는 동상이 있고, 바다를 향한 장식벽에 하트 모양으로 뚫린 구멍이 나 있어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얼굴을 들이밀며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동상은 이곳에서 열린 오래 키스하기 대회에서 수상한 부부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 공원은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에 만든 구엘공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사랑의 공원에서 나와 시청사가 있는 곳으로 걷다 보면 케네디공원을 만나게 된다. 공원은 별로 크지 않지만, 시민의 휴식처로 손색이 없다. 주변에는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식당, 노천카페, 술집이 많아서 밤 문화를 즐기려는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이 흥겨운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다. 


하지만 리마는 페루의 전부가 아니었다. 한 곳 한 곳 찾아갈 때마다 색다른 볼거리는 여행자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었고, 다음 행선지에 대한 궁금증 지수를 높임으로써 더욱더 활기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글·사진 남인복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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