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영웅은 없다…우리가 진화해야 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4-12-20 09:17:03
27개 이야기로 장편 '일곱째 아이' 펴낸 소설가 박정애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강빈'의 유복자 풍문 바탕으로
'아기장수' 설화 투사해 새 세상 꿈꾸는 이들 소망 담아
"탄핵 집회 지혜로운 젊은 여성들에게서 희망을 느껴"

소설가 박정애(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교수)가 새 장편 '일곱째 아이'(단비)를 펴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여 동안 억류돼 있다가 돌아온 소현세자의 아내를 내세운 '강빈' 이후 11년 만이다. 이번 소설은 '강빈'에서 다루지 못했던, 유복자 일곱째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풍문이 바탕이다.

 

▲ '강빈'에서 다루지 못했던 유복자 '일곱째 아이'를 27개 조각보로 완성해낸 소설가 박정애.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강빈은 일곱째 아이를 사산하고 사가로 옮겨져서 사약을 받았는데, 그 일곱째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고 궁녀에 의해 외부로 반출돼서 강빈과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비구니에게 넘겨져 몰래 길러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사실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숙종 대에 이르러 자신이 그 일곱째 아이라고 주장하는 승려가 출현해 처형당하는 얘기도 숙종실록에 등장한다. 소설은 이 얼개를 중심으로 27개의 '조각보'를 모아 전체를 완성한다. 이 에피소드들을 총괄하는 화자가 직접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다.

'아, 그 누가 깊이 파묻은 이 항아리를 열어볼 텐가. 백 년 뒤 혹은 이백 년 뒤 상전이 벽해 되듯이 집 뒤란이 푹 꺼져 항아리 뚜껑이 드러나면 어느 호기심 많은 이가 들춰볼 텐가. 아니면 항아리는 깨져 바스러지고 종이는 썩어 문드러져 한껍에 진토가 될 텐가. …단출히 사는 한 늙은이가 죽음보다 더한 심심함을 못 이겨 재미로 적은 글, 읽어 줄 만하면 읽고 못 읽겠거든 던져버리기를.'

세책방 언문소설책 베끼는 삯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여성이 말년에 딸자식 하나 잘 둔 덕에 모자람 없이 살면서 여기저기서 듣고 자신이 상상한 내용을 덧붙여 만들었다는 너스레다. 그이는 못 읽겠거든 던져버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종과 궁녀, 승려와 양반 서자 들의 처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전체 이야기는 '아기장수' 설화를 뼈대로 나아간다.

아이가 태어나서 영웅이 될 것 같다는 점지를 받으면 후일 멸문지화를 당할까봐 미리 죽였다는 아기장수 설화는 도처에 남아 있다. 박정애는 '일곱째 아이'가 살아 있다는 소문과 심지어 그 아이를 몸주로 모시는 무당들까지 등장했던 배경에는 팍팍한 세상을 뒤엎어주기를 바라는 민중의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자신이 일곱째 아이, 왕손이라고 믿는 소설 속 승려 '처경'의 현실 속 아비 '손도'는 무자비한 폭력을 어머니에게 휘두르는, 비린내 나는 형방 아전이었다.

-역관의 처가 아기를 낳고 야소교(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기장수'와 '야소'를 등치시킨 건가.
"처경은 자신이 비루하고 남루한 태생이 아니고 뭔가 고귀한 태생일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는데 그 생각의 헛됨을 나중에 죽을 때에서야 깨닫는다. 마지막에 화자의 딸이 야소교에 빠져서 천국을 바라며 이승의 삶이 검부러기 같다고 말할 때, 그렇게 바라볼 게 아니라 손녀에게 우리보다 한 줌 더 복되고 두 뼘 더 지혜롭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진화한 자신을 바라는데, 사실 아기장수라는 설화는 그런 상태를 바라면서도 그 싹을 부모 손으로 죽이는 민중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먼 데서 용마를 타고 오는 영웅을 바라면서도 현실에서는 길러내기를 꺼린다."

-새 세상을 바라면서도 포기하는 이중성의 배경은?
"두려우니까, 눈앞의 현실적인 이익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그런 희망을 가져보았자 실현되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지레 포기한다. 우리 자신이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탄핵 촉구 집회에 쏟아져나온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희망을 보았다. 초콜릿과 젤리를 나눠 주면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저는 모르는 많은 노래들로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사회자부터 발언자들까지 여성들이 집회 풍경을 주도했다. 저보다 더 지혜롭고 몇 걸음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한중록'을 필사하는 노력으로 당대의 어투를 감칠맛 나게 살리는 박정애의 문장은 밀도가 높고, 행간에는 격정이 뜨겁다. 여종 살이를 하면서 양반네들이 집적댄 탓에 아이를 일곱이나 사산한 '애숙'을 품어주는 승려 '처경'의 한 대목.

'지금 애숙은 몸과 정신이 따로 놀지 않고 한껍에 황홀하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바람처럼 그의 몸을 흔들다… 방구들을 데우는 아궁이의 불기운처럼 그의 몸을 데우다… 끓는 가마솥의 습기가 부뚜막으로 번지듯 그의 몸에 번지다… 이윽고 스며들다… 마침내 새벽이슬에 휘적신 풀잎과 같이 홀로 흥건한 사타구니.'

199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박정애는 장편 '물의 말'로 2001년 6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소설 동력을 충전했다. 이 첫 장편은 여성 3대를 그린 탁월한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소현세자빈 강빈을 당대에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과 생각들을 흡수한 뛰어난 여성리더로 내세운 두번째 장편도 여성과 생명을 천착하는 흐름이었다.

-'강빈'을 걸출한 여성 리더십의 상징적 존재로 본 이유는?
"강빈은 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살아본 여성이다. 왕실 여성은 구중궁궐에 갇혀서 궁중 암투에 끝없이 시달리는 존재인데, 우리 민족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병자호란 때문에 강빈이 심양과 베이징에서 8년 넘게 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떴다고 보았다(인조는 강빈을 패악을 부리는 모진 여성으로 몰아 사약을 내려 죽였고 집안까지 몰살했다). 인질로 볼모 살이를 하면서 남편(소현세자)과 둘이서 후궁도 두지 않고 서로 의지하면서 일곱 명이나 자식을 낳았다. 사산한 막내아들을 제외한 세 아들  중 둘은 어린 나이에 유배지에서 죽고 경안군만 살아남아 후손을 두었다. 그 환경에서 강빈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서 장계도 쓰고 농사도 지도했다."

-이번 소설도 여성과 생명에 방점을 찍는 흐름인가.
"굳이 그렇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제 또래 여성들에게는 생명을 품고 기르는 여성적인 면 때문에 억압을 받아왔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누르고 남성성을 가져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정도 합리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리더십도 남성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생명을 품고 돌보고 기르는 여성적인 리더십이 뒤에 숨지 말고 전면으로 나서야만 지구도 살고 인간의 멸종도 늦출 수 있다고 본다."

-왜 지금 '일곱째 아이'인가.
"우리는 현재적 관점으로 사실 역사소설도 쓰지 않나. 작가는 현재를 사니까 현재의 어떤 생각을 과거에서 빌려와 자기 생각을 결국 쓸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군가 와서 이 판을 싹 정리해줄 영웅을 갈망하지만 그런 기대는 항상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이 조금 더 진화를 해야 된다. 그런 소망을 담았다. 탄핵집회에 참가한 여성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 박정애는 "누군가 이 판을 싹 정리해줄 영웅을 갈망하지만 그런 기대는 항상 실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가 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정애는 이번 책 날개에 찰스 디킨스의 연보를 읽다가 마지막 기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 썼다. '1870년 6월 8일, 갯즈힐의 서재 샬레 하우스에서 종일 원고를 쓰고 난 후 저녁 식사 때 쓰러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지상에서의 종말이 아닌가, 아직도 나한테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보다 더 재미있고 짜릿하고 충만한 일(더 괴롭고 아리고 쓸모없는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그리 좋은가.
"다른 재미 있는 게 특별히 없었다. 제가 이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현실에서 모든 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건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제가 만들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고 완성도 할 수 있는데, 그 이상 가는 재미가 없다."

내년 벽두에는 장편동화도 출간 예정인 박정애는 "타깃 독자를 상정하면 제 안의 다른 나를 끄집어낸다"면서 "미국까지 무대를 넓힌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스케일이 큰 다음 장편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일곱째 아이' 마지막 문장에 압축한 희원.

'너를 보고 있는데도 네가 그립구나. 할미보다, 네 어미보다, 한줌 더 복되고 두 뼘 더 지혜롭고 세 발 더 멀리 나아 갈 네가. 할미도… 젖 먹던 힘까지 불러내어 오래 살게. 왜냐면… 너를 기다려야 하니까.'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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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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