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에서 하라는 대로 임차권등기 해제했더니 법률상 불이익
오락가락 심사 기준에 분통 "제대로 된 규정이 있긴 한지 의문"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임차인에게 떠넘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공기업이 이래도 되는 건가요?"
13일 만난 전세 임차인 A 씨는 연신 울먹였다. 아무런 잘못이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A 씨는 2022년 8월에 만료된 전셋집의 보증금을 아직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덜렁덜렁 계약해서 전세사기를 당했다'던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과 달리 A씨는 어느 것 하나도 덜렁덜렁하지 않았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당연히 챙겼고, 공기업인 HUG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에도 가입했다. 만료 5개월 전에 집주인에게 퇴거 통보를 했다. 집주인이 제날짜에 돈을 내 주지 않자 곧바로 임차권등기명령도 신청했다.
A씨의 집주인은 소위 '바지 임대인'으로 불리는 유형이다. 원래 집주인이 공인중개사와 짜고 변제능력이 없는 제3자에게 집의 명의를 넘기는 전세사기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도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면 보통은 문제될 것이 없다. 집주인 대신 HUG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으면 된다.
하지만 일이 유독 공교롭게 흘렀다. 임차권등기 결정문 공시송달이 시작될 때만 해도 살아있었던 집주인이 송달 진행 중 돌연 사망한 것이다. HUG에서는 임차권 등기의 효력에 문제가 생겨 보증 이행을 유보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부터 거의 2년 가까이 A씨의 시련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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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보험 이행을 청구하기 위해 준비한 서류뭉치. 여기에는 임차권 등기 관련 법원 서류와 집주인의 인적사항, 상속인 인적 사항 등의 서류가 포함돼 있다. [유충현 기자] |
"법원이 뭐라든 돈 받으려면 우리가 하라는대로 해야"…HUG의 으름장
HUG는 A 씨에게 결정문의 효력을 스스로 입증하라고 했다. A 씨는 백방으로 뛰었다. 법원민원지원실, 법률구조공단, 전세지원센터 등 기관의 상담을 받았다. 모두 비슷한 의견이었다. '공시송달이 시작될 당시 임대인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단지 도착의 이유로 등기의 효력이 없다거나 결정문이 무효라고 볼 수 없다'고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HUG만 해석이 달랐다. A 씨는 유사한 다툼이 있었던 대법원 판례(대법원 1997. 11. 28. 선고 95다51991)도 확보했고, 법원에서 경정결정문(판결의 내용을 변경하지 않는 범위에서 부분적인 정정)까지 발송해 줬지만 소용 없었다. HUG 심사담당자는 "어쨌든 보증금 대위변제는 HUG에서 해 주는 것이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HUG는 A 씨에게 이미 진행된 임차권 등기를 해제하고 상속인을 '직접' 찾아 다시 결정문을 보내라고 했다. 전세자금대출 만기 날짜는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A 씨가 "등기를 해제하면 불이익이 없느냐"고 묻자 HUG 담당자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말을 믿었던 A씨는 결과적으로 큰 불이익을 당했다.
A 씨와 같은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르자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임차권등기명령 절차에 관한 규칙'을 개정했다. 등기 시점에 임대인이 살아 있었다면 효력을 준다는 내용이다. '개정 이전의 임차권등기명령에도 소급 적용한다'는 부칙도 뒀다. 하지만 A 씨는 HUG가 요구한 대로 첫 등기를 해제한 탓에 혜택을 못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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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옥내 안내판. [뉴시스] |
참다 못해 소송 걸었더니 그제서야 "소 취하하면 보증이행해 주겠다"
임차인 개인이 죽은 집주인의 상속인을 일일이 찾기란 쉽지 않다. 본인 명의를 제공하고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받는 '바지 임대인' 가족은 더욱 찾기 어렵다. 1·2순위 상속인(부모, 자녀, 배우자)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3순위(형제·자매)나 4순위(사촌)를 전부 찾아야 한다.
HUG는 뒷짐만 지고 있었고 A 씨는 상속인을 찾느라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나마 자신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법원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상속인을 찾았다.
하지만 상속인을 찾고도 일이 순순히 풀리지 않았다. 모든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법원에 상속재산관리인 선임을 신청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HUG 담당자는 "모든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하면 HUG가 상속재산관리인을 선임할 것"이라고 안내하더니 정작 그 상황이 닥치자 말을 바꿨다. 모든 절차 진행 및 비용 부담은 A 씨에게 뒤집어씌웠다.
HUG와 절차적 공방을 벌이는 데만 거의 2년이 흘렀다. 법원과 행정기관을 오가는 행정업무에 지출된 비용만도 약 1000만 원이다. A 씨는 다니던 직장도 옮겼다. 전세계약 만기 시점에 연 2%대였던 전세대출 이자는 5%대로 훌쩍 뛰었다. 제때 보증금을 돌려받았다면 내지 않아도 되는 은행이자를 2000만 원 넘게 지출했다. 체중이 18kg 빠질 만큼 건강도 크게 나빠졌다.
참다못한 A 씨는 지난해 HUG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HUG의 대응이 달라졌다. 임차인 스스로 선임해야 한다던 상속재산관리인을 올해 초 HUG가 선임해줬다. 그동안 지급할 수 없다던 보험금도 지급하겠다고 했다. 단 A 씨가 소송을 취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물론 다른 비용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간 빚까지 내 가며 지출한 소송·행정비용과 이자비용 등 수천만 원의 손실은 온전히 A 씨가 부담하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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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혜화동 일대 빌라촌. [KPI뉴스 자료사진] |
소송 이겨도 HUG가 항소하면 신용불량자 전락…'울며 겨자먹기' 합의
A 씨는 어쩔 도리가 없이 HUG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만기연장으로 버틴 전세자금대출 상환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려워서다. 1심에 이겨도 HUG가 항소한다면 보증금을 돌려받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대출을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A 씨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HUG의 오락가락하는 기준이다. 처음에 직접 하라고 요구했던 상속재산관리인을 나중에는 HUG에서 선임했다.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인지, 심사담당자가 바뀐 덕인지 A 씨는 알지 못한다. 그는 "담당자의 안내와 본사에 문의했을 때 답변이 서로 맞지 않을때도 많았다"며 "모든 과정에 제대로 규정이 있긴 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법률전문가들도 HUG가 계약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세보증보험 약관에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 보증채권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고 명시돼 있는데도 실상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성민 변호사는 "공적기관인 HUG가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임차인 계약자들에게 적절한 법률적 지원을 하진 못할 망정, 임차권 등기의 효력을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A 씨 사례에 대해 HUG는 "보증보험 이행심사 규정과 매뉴얼에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규정과 업무매뉴얼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다.
HUG 관계자는 "2022, 2023년에 많은 전세보증사고가 발생하면서 갑자기 관련 업무가 폭증했다"며 "이런 경우는 워낙 특이한 사례이고 심사 담당 직원들이 일거에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매끄럽지 못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KPI뉴스 / 유충현 기자 babybu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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