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시장경제 근간…검토에 그치길
정부가 1·2세대 실손의료보험 계약을 강제로 무력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보장 범위를 대폭 축소한 '5세대 실손보험'을 내놓으면서 금융당국이 은근히 꺼내든 이야기다.
1·2세대 가입자들이 5세대 실손으로 갈아타도록 자발적 전환을 유도하겠지만 전환 효과가 미미하다면 약관 변경(재가입) 조항을 적용하는 법 개정까지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실손보험은 어디까지나 민간 부문의 계약이다. 민간 주체들 사이에서 정당하게 체결된 계약을 정부가 마음대로 조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마치 민간의 계약이 정부 판단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단순한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환 효과가 미미하다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사실상 의미 없는 수사(修辭)에 가깝다.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2021년 4세대 실손보험을 출시했을 때도 별의별 인센티브를 제시했지만 갈아탄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1·2세대 가입자들이 혜택을 포기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강제 전환'만이 남는다. 이게 정부의 본심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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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숙 보험이용자협회 활동가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의료체계 정상화를 위한 비급여 관리 및 실손보험 개혁방안 정책토론회'에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에게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
실손보험의 문제점은 꾸준히 지적돼 왔다. 일부 병원과 피보험자의 과잉 진료, 이른바 '의료 쇼핑'으로 인해 보험사의 손해율이 급증했고 나아가 의료 산업까지 왜곡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 전환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정책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추진 과정이 무조건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손보험은 애초에 보험사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상품이다. 다만 실제로 운용해 보니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손실이 발생했을 뿐이다. 보험사도 정밀한 예측과 계리에 실패한 책임이 있다. 계약 당사자는 계약 체결 시점에서의 판단 착오나 예측 실패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발상만으로도 '정부가 보험사의 편을 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시장 경제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이 체계는 '계약이 지켜질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믿음이 약화될수록 체제도 약해진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부가 사적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다면 국가 경제의 신뢰 자본이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다음 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1930년대 미국에서는 '황금 압류 사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다. 루스벨트 정부는 대공황 극복을 명분으로 모든 금화를 압류하고 '금으로 대가를 지급하도록' 작성된 계약·채권을 무효화했다. 이러한 조치는 커다란 비판을 받았고 미국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초래했다는 것이 여러 경제학자들의 견해다.
복잡할수록 원칙이 중요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부가 사적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우리 경제의 신뢰 자본을 갉아먹을 공산이 크다. 정부의 무리한 개입으로 인한 부작용은 예상보다 크고 오래 지속된다. '실손보험 강제 전환'은 검토 단계에서 그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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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충현 경제부 기자 |
KPI뉴스 / 유충현 기자 babybu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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