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시베리아의 눈물, 작은 우주에 바치는 송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4-02-23 17:17:29
세번째 소설집 '시베리아, 그 거짓말' 펴낸 정태언
전쟁과 경색된 남북관계로 닫힌 북방에 대한 상상력
러시아문학 전공한 소설가가 탐색한 삶의 곡절들
거대담론 벗어나 '한 뼘' 거리 인간의 '우주' 탐색

우-웅 하는 음에 배 속이 울려왔다. 샤먼의 북소리 같은 알타이 소리는 내 배 속을 휘저은 다음 머릿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가슴을 메웠다. 나는 가열된 진공관 속 입자처럼 달아올랐다. 뭔가를 깨우는 것 같은 음, 실제 뭐가 깨어났는지 딱 집어 말할 수 없어도, 뭔가가 내 안에서 깨어나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십대 후반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북방의 공간을 천착해온 소설가 정태언. [도서출판 강 제공]

 

웬일인지 낙타가 자신이 낳은 새끼를 외면한다. 어미 젖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배 밑으로 들어오는 새끼를 박정하게 쫓아낸다. 안타까운 낙타 주인이 마두금 연주자와 소리꾼을 불러왔다. 마두금에 맞춰 깊은 땅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소리를 듣던 어미 낙타는 굵은 눈물을 흘린다. 새끼가 젖을 빨아도 내버려둔다. 정태언의 세 번째  소설집 '시베리아, 그 거짓말'(강)에 수록된 '한 뼘'의 화자도 이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린시절 작고한 모친이 아픈 몸으로 그를 멀리하던 기억과 겹쳤기 때문일까.

알타이의 '카이치'가 부르는 '카이'는 '지하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우주에 닿을 것 같은' 그런 음이었다.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에 학술 발표차 갔던 '나'는 저 영상을 접한 뒤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알타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만난 카이치 '카르쉬'는 알타이 말로 '한 뼘'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그가 '우주의 날'을 SNS에 올렸고, 우주라는 단어에서 촉발된 기억은 '한 뼘'으로 발효됐다.

'나'에게 '우주'는 답답한 진공관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시절 동네를 벗어난 지구의 공간은 광활하게 넓은 무대가 아니었고, 우주라는 것조차 진공관 속에서 움직이다 부딪치며 아우성치는 입자들의 공간과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공황장애 같은 상태에 자주 머무르곤 했던 것인데, 저 깊은 곳에서 배 속을 울리듯 솟구쳐 올라오는 '뇌를 파고 들어 뭔지 잘 몰라도 영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을 접하면서 우주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우주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깝게 가슴에 스며 있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그 정도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바로 가까이 붙어 있는 그런 공간인 거죠.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속에 어머니도 계시고 카르쉬 같은 친구도 있는 셈이죠. 거창한 공간이나 개념이 아닌 그런 소소한 우주가 제가 소설에 담는 내용입니다. "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뒤늦게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방의 공간을 작품 속에 꾸준히 반영해온 소설가 정태언(63)의 말. 전화로 만난 그는 "등단 무렵에는 거대 담론이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싶었는데 이제는 소소하고 작은 것들이 진짜 우주 같다"면서 "소설은 그런 소소한 우주를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런 쪽으로 작업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소설집에 담은 단편 8편 중 절반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중심의 북방 공간이다. 이런 공간들이 한국문학에 수용되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북방을 드나들며 시베리아 산문집도 펴내면서 원주민들과 접촉해온 그의 공력이 반영된 결과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고, 남북 관계는 경색될대로 경색돼 북방에 대한 상상력 자체가 차단되는 듯한 이즈음이어서 그의 소설 무대가 새삼스럽게 귀하다.


정태언은 "북방에 대한 상상력이 정치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국제정치는 잘모르지만 한반도가 섬처럼 고립돼가는 형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는 현실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표제작 '시베리아, 그 거짓말'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줄기차게 강단에서 설파했지만, 이데올로기와 각국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절된 현실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사정을 드러낸다.

학기당 백여 명의 수강생이 시베리아란 말을 되뇌었다. 일 년에 두 학기, 그렇게 십 년이면, 어림잡아도 이천여 명 이상이었다. … "남북한 철도가 뚫려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연결될 테니 여러분들은 원대한 포부를 지녀야 합니다." 정말 '원대한' 거짓말이었다. 물론 이 거짓말은 나만 친 게 아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먹였다. 이제 거짓말임을 너무도 잘 안다.

'아프리카'와 '골로먄카에 대한 상상'도 북방이 무대다. 시베리아 투바공화국에서 만난 '온다르'는 '타이가와 초원으로 퍼져나가 저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목 노래'를 부르는 투바국립극장 부원장이었다. 그의 부음을 듣고 회상하는 이야기인데, 그때 만났던 그의 사무실 벽에는 아프리카 지도가 걸려 있었다.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들먹이며 시베리아에서 뜬금없이 '아프리카'를 열망하던 남자. 아프리카는 그의 비원을 되새기게 한다.

투명하게 속이 보인다는 바이칼 호수의 '골로먄카'는 보일듯 다 보여주지 않는 인간들의 속내를 흥미롭게 드러낸 단편이다. 시베리아 여행 중 만난 '마사이 신발'의 여자가 문제적 인물인데, 남편이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그 전갈을 무시하며 일행들의 밉상으로 활보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녀의 전화 공세에 시달리는 화자는 거듭 자문한다. '투명해 속이 다 비친다는 골로먄카. 수온과 조도에 따라 다르게 비치는 골로먄카. 누가 그 속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북 치는 소년'은 "내용 없는 이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으로 이어지는 김종삼의 시에서 촉발된 칼럼을 접한 뒤, 고아원 소년 '영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단편이다. 원장 집에서 호의를 베푼 식탁의 찌개 냄새가 고아원에 버려지기 전에 맡았던 냄새와 일치한다고 우기며 원장부부야말로 친부모라고 강변하는 영호를 매몰차게 대했던 '나'. 애기 때 냄새까지 기억하는 영호를 두고 '어쩌면 내가 속으로 민중이니 어쩌니 하며 그를 의무감 비슷한 것으로 대할 때 내 속마음을 읽어냈을 수도 있었다'고 돌아선 '나'의 속마음을 돌아보는 태도는 '그날이 오면'의 정조와도 맥이 통한다.

 

▲정태언은 시베리아 지역을 오랫동안 답사하며 그곳 원주민들에게서 한반도 문화를 닮은 친연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도서출판 강 제공]

 

주택가의 고물상 '창대 자원'의 엄청난 소음에 맞서온 '나'는 그들과 대치하며 그들이 철거당할 '그날'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젊은 시절 시위를 준비하며 틀어대던 낯익은 노래 '그날이 오면'이 광복을 기념하는 날 들려오자 나는 어쩌면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민중이라는 말에 감응하던 시절, 그날을 눈시울 붉혀가며 갈망하던 감수성은 현실 속에서 바래졌고 경계가 희미해졌다.

"이데올로기로 접근하면 무조건 영호 편을 들어야야 하고 창대자원 편을 들어야 하는데 실제로 뒤집어보면 아닌 것들이 있단 말이죠. 그걸 양쪽으로 보여주면서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죠. 운동을 하다 실패한 것을 다룬 건 아니고, 마음에 남는 불편함같은 것들을 표현해본 겁니다."

'축약시대'와 '조용환 약전을 쓰다'는 소소한 우주를 소설에 담고 싶은 정태언의 작의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단편들이다. 함께 소설을 공부했던 P라는 사내는 '막걸리 국가보안법'에 걸려 이 땅에서의 삶을 망치고 중국 길림성으로 죽기 위해 갔다가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 재생한 경우. 그가 오랜만에 귀국해 '나'에게 탄원서를 부탁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그의 모친이 수수께끼처럼 외치던 '안다'와 '언더'는 별이 떨어지는 '유성음(流星音)'이었을 수도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P의 삶을 짤막한 탄원서로 축약하는 것은, 없는 영웅을 만들기 위해 과장해서 늘리는 '조용환 약전' 을 쓰는 행위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정태언은 "소소하게라도 우주에 담아줘야 하는데 제외하고 삭제해버리거나, 반대로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라고 하는 것은 같은 문제"라면서 "소설은 축약하거나 과장하지 않은 우주를 담는 그릇"이라고 거듭 말했다.

건축학도였다가 군 병원에서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을 접한 뒤 러시아문학으로 방향을 튼 이래 소설이라는 우주의 북방을 꾸준히 천착해온 정태언. 그는 "작가의 말을 쓰는 지금 영하 40도가량 떨어진 아득한 북방. 그곳으로 달려가고픈, 그래서 그곳에서 폭양 속 아프리카의 열기 같은 열정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고 썼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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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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