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 최적 아닌 전체 최적 유인하는 거버넌스 개혁 필요
스테이블코인, 인공지능(AI), 기후위기.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 이슈이자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통화와 국가의 관계를 다시 묻고 AI는 생산, 고용, 지식의 질서를 재편하며 기후위기는 지속가능성장과 휴먼시큐리티, 세대 간 계약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기존의 정책 프레임워크로 이들이 가져오는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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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 대응에 필요한 거버넌스 개혁 관련 이미지 [챗GPT] |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는 각각으로도 기존 정책 프레임워크를 압박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상호작용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원이 다른 형국을 만들고 있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데 비해 이에 대응하는 정책은 분절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라 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전통적인 재정정책, 통화정책, 금융정책의 영역을 하나의 구조 안에 묶어 놓았다. AI는 재정정책의 기반, 통화정책의 가정, 금융정책의 분석 모델을 흔들 수 있다. 기후위기는 재정 전망, 통화정책 대응, 금융시스템 안정 등에 구조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영향들이 개별 정책 영역별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중첩되어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의 정책기구(apparatus)는 여전히 재정, 통화, 금융을 분절적으로 다루는 제도적 설계 위에 상당 부분 서 있다. 전통적으로 정책 실패에 대한 논의는 정책 수단의 선택이나 정책 강도의 적정성에 집중되어 온 측면이 있으나 지금의 문제는 정책기구 자체의 설계와 작동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정·통화·금융정책 당국이 기존의 정책 프레임워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필요하며 설득력이 있다.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 대응은 재정당국, 중앙은행, 금융당국 어느 한 정책기관의 전속적 권한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이는 권한의 공백 구간에 놓여 있다기보다는 동시적 권한(concurrent authority) 또는 불확정적 권한(uncertain authority)이 작동하는 영역에 속해 있음을 뜻한다. 이른바 정책의 여명지대(zone of twilight)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여명지대는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다. 여명지대에서는 정책당국 간 책임이 모호할 수 있고 의사결정은 지연될 수 있으며 위기 대응은 뒤늦게야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기술과 시장과 생태계는 빠르게 움직이는데 정책은 누가 어떻게 나서야 하는가를 논의하다가 시간을 허비할 위험성이 커진다. 그래서 더욱 문제의 핵심은 정책 거버넌스다.
과거의 정책 프레임워크는 적지 않은 부분 우호적 환경과 행운 속에서 만들어진 상황에 힘입어 작동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견실한 경제성장을 구가한 대안정기(great moderation), 통화지배(monetary dominance)의 시대, 세계화(globalization) 등의 순풍은 정책 역량이 다소 불충분하더라도 성공을 가능케 했던 여건을 제공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은 사뭇 다르다. 공급 충격, 지정학적 분절, 기술의 폭발적이며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의 확산, 기후 리스크의 누적은 정책 오류의 허용 범위를 극도로 좁히고 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과거의 정책 성공 경험은 오히려 인식의 경직성(cognitive rigidity)을 높이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정책결정기구 구성원의 인식 다양성(cognitive diversity)이 부족한 가운데 예전 성공의 기억이 만들 우려가 있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경계해야 한다.
과거의 정책 거버넌스는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각 정책이 자신의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면 전체적인 목표도 달성될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설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대전환기에는 이 전제가 잘 성립하지 않는다. 한 정책의 성공이 다른 정책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고 부분적 안정이 시스템적 불안을 키울 수도 있다. 바로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다.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판단이나 행동이 집합적으로 적용될 경우에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현상이다. 오늘날의 정책 문제는 바로 이 논리학의 함정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옳은 정책이 전체적으로는 옳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정책의 경우 예컨대 재정당국이 재정규율 강화를 미루고 스테이블코인 수요에 기대어 국채 발행을 늘리면 단기적으로는 재정이 안정된 듯 보일 수 있다. 중앙은행이 스테이블코인 환매 등 금융 불안을 우려해 반복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면 개별 시점에서는 위기를 막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금융당국이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강한 규제로 리스크를 봉쇄하면 즉각적인 사고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이 동시에 누적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채 신뢰는 서서히 약화되고 통화정책의 중립성은 흔들리며 금융시장은 정책당국에 과도히 의존하는 구조로 고착될 수 있다. 각 정책은 자신의 목표를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구성의 오류가 발생한다.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는 공통적으로 정책 간 상호작용의 강도를 높인다. AI는 생산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고용구조를 흔드는 경우 재정지출 압력을 키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투자 확대는 재정과 금융을 자극하게 되고 통화정책 판단도 복합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각 정책이 자기 영역에 충실할수록 외려 전체 불균형이 커질 위험성이 우려된다. 과거의 정책 프레임워크는 부분 최적화의 합이 전체 최적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었지만 문명사적 패러다임 대전환기에는 이 전제가 흔들린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협의나 조율을 넘어서는 인센티브 정합적인 거버넌스 개혁이다. 예컨대 특정 정책당국이 전체 최적화 달성에의 협력이 부족한 경우 또는 반대로 정책의 상호조화를 잘 이루는 경우 그 기여도에 따라 성과가 귀속되도록 설계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 간 협력이 부족한 이유는 대체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협력해도 보상 유인이 미미하고 실패 시 책임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성공의 성과는 각 기관의 평가 체계에 정합성 있게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의 여명지대에서는 협력 목표 설정, 협력 성과 지표, 협력 책임 구조, 그리고 실패를 학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프레임워크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거버넌스 개혁은 곧 정책당국의 행동 함수를 바꾸는 작업이 된다.
아울러 우리 시대의 재정·통화·금융정책은 연계적 거버넌스로의 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합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각 정책당국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전문성을 중시함으로써 정책 정보 공유, 정책 시나리오 공동 토의, 위기 시 역할의 사전 합의 등 전문성의 지대(zone of expertise)를 제도화하는 거버넌스라 할 수 있다. 정책의 여명지대에서는 사후적 대응 조치보다 사전적 정책 조율 능력이 정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거버넌스 개혁은 중차대한 과제가 된다.
예컨대 스테이블코인 정책 논의에서 중시하는 통화지배의 복원은 중앙은행만의 단독 과제가 아니다. 재정의 신뢰, 금융의 지속가능성이 함께 확보되지 않으면 통화지배는 일시적 환상에 그친다. 이상적인 스테이블코인 정책 조합 방향은 재정지배의 완화, 통화지배의 강화, 금융지배의 완화라는 삼각 구도다. 이는 어느 한 정책당국이 단독으로 만들 수 있는 구도가 아니라 거버넌스 차원의 공동 설계가 필요한 과제다.
문명사적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필요한 정책결정자의 철학은 무엇인가.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는 공통적으로 '공짜 점심'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뿐 아니라 시장이 자동으로 균형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대전환기에는 정책 실패의 비용이 과거보다 훨씬 커지므로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의 성공 경험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 성공이 상당 부분 우호적인 시대 환경이라는 행운에 힘입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겸허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의 기반 위에서 정책 프레임워크를 다시 설계하려는 진지함이다.
패러다임의 대전환기는 정책결정자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과거의 틀에 안주하며 타성적 대응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정책의 여명지대에서 새로운 조화의 질서를 설계할 것인가. 구성의 오류는 정책의 여명지대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스테이블코인, AI, 기후위기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과제는 구성의 오류를 넘어서는 정책 거버넌스의 설계다. 정책의 여명지대는 더욱 확대되는 추세이며 기존 정책 프레임워크의 유효성은 축소되고 있다. 부분 최적 아닌 전체 최적 인센티브를 유인하는 거버넌스 개혁이 긴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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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
● 조홍균은
법·제도경제학자이자 35년 경력 중앙은행가. 경제, 금융, 기업 관련 정책과 제도를 주로 천착했다. 통화금융정책, 금융체제, 금융감독, 금융산업, 기업정책, 법경제 실무와 이론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중앙은행과 정부, 국제기구, 학계, 언론계 등에 걸쳐 폭넓게 이력을 쌓았다.
△ 미 워싱턴대 법학박사(J.D./J.S.D., 법경제학) △ 1989년 한국은행 입행 △ 1990년 조사제1부 조사역 △ 1999~2012년 정책기획국 과장 차장 팀장 △ 2016년 금융감독원 거시감독국 파견국장 △ 2017년 한국금융소비자학회 부회장 △ 2018년 한국금융연수원 교수 △ 2022년 경제연구원 부원장 △ 저서: 우리 시대의 금융경제 읽기(박영사, 2025년) △ 현재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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