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교수들의 웃지 못할 천태만상
올바른 사회 만들 지식인 책무 저버린 채 사익 추구
'정치와 자본의 종복'이 돼버린 대학 사회 인물 열전
‘시일야방성대학’으로 대학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했던 소설가 고광률이 대학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포착한 또 하나의 소설 ‘대학’(전2권·바람꽃)을 펴냈다. ‘허틀러 행장기’와 ‘잃어버린 정의를 찾아서’를 각각 부제로 거느린 이 연작소설집은 중편 4편, 단편 6편으로 구성됐다.
지방 사립대학인 가상의 '중석대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공익과 학생보다는 사익과 보신에 급급한 교수들을 중심으로 흥미롭게 진설함으로써 높은 가독성과 함께 당대 지식인 사회의 이면을 강도 높게 풍자한다. 실제로 중석대학과 비슷한 규모의 대학에서 40여년 간 교직원으로 일해온 지은이가 겪은 일이 생생하게 투영돼 실감을 돋운다.
![]() |
| ▲전작 '시일야방성대학'에 이어 대학 사회 구성원들의 실체를 신랄하게 풍자한 연작소설집 '대학' 전2권을 펴낸 소설가 고광률.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전작인 ‘시일야방성대학’이 '통사'라면 이번 소설은 ‘열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통상 대학 문제를 거론할 때는 사학 비리를 떠올리기 쉽다. 내 경우에는 무한 권력을 누리면서 현실에 안주해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리는 교수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사학 비리라는 것도 교수들이 정신을 차린다면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그들은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모순이나 부조리에 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데, 결국 사익을 위해 그냥 안주하니까 그런 큰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폴리페서'라는 것도 그렇다. 대학 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는 이들이 정권에 참여해 현실 세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행위들은 지식인의 책무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사실 대학의 현실을 파고 들었다기보다 이른바 최고 지성인들이 모여있는 곳이 대학이기 때문에 지식인들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걸 쓴 셈이다.”
-대학이 정치와 자본의 종복이 됐다고 썼다.
“오늘날 정치가 정말 피지배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공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여 놓으면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지식인들이 오히려 그들의 잘못에 논리나 근거를 제공해주면서 자신들의 달달한 이득을 챙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IMF사태 때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도 경제학자들은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들은 빠져나갈 시간을 벌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본의 편에 붙어서 그런 일을 해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지식인인 교수들이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전형적인 경우들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 세상에 우가 있고 좌가 있으며,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다는 순진무구한 생각들을 하고 사는 것 같다. 죽은 자식 불알만도 못한 것들에 대한 허튼 생각이다. 신념이 진리의 적이듯, 이념은 정의의 적이다. 세상을 위해 진실과 정의를 찾아 밝히고 지키려는 극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을 위해 이를 감추고 왜곡하려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작가의 말에 언급한 저 대목은 작금 한국사회의 정황에 비추어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념은 진리의 적'이라는 니체의 말을 빌려 ‘이념은 정의의 적’이라고 패러디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본다. 다 같이 통치를 할 수는 없으니 지배자가 효율적으로 지배할 궁리를 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피지배자들이 부당한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저항하고 분노할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올바른 사회는 이러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피지배자들이 자본가와 권력자들 편에 서서, 오히려 분노하고 저항한다고 뭐가 달라지느냐고 억압하고 권력자나 자본가에 붙어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챙기고 배신하는 그런 세상이다. 보수나 진보라는 것은 어떤 선이나 공익과 행복을 위해 나아가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결과는 아니다. 수단을 목적인 양 그 시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하는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의 과오가 매우 크다.”
1권의 부제 ‘허틀러 행장기’는 허삼락이라는 국문과 교수의 행장을 담은 중편에서 가져왔다. 허삼락은 메이저 신문의 지방 주재기자로 살다가 중앙에서 내려온 거물 문인의 추잡한 술자리 행태를 목격한 뒤, 그 무마 대가로 엉겁결에 ‘저항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대학 총장의 약점까지 거머쥐고 하루아침에 ‘수박서리하듯’ 교수가 되어 막강한 배후 인맥을 활용해 ‘실용문예창작과’를 개설한 뒤 학과장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허삼락이 심야에 모텔들이 즐비한 인근 커브길에서 여자를 태우고 직진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오로지 그의 뒷바라지만 하면서 이제나저제나 전임 자리를 바라던 ‘나’의 시선으로 사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허삼락이 교수가 되어 연구실에 입성할 때 옆방의 교수가 찾아와 ‘견리사의(見利思義)’ 액자를 보며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오우, 우리 허 교수님. 저항시인이라시더니, 사회주의자신가 봐. …자본주의는 이윤, 사회주의는 의리잖아요. 우리는 이윤을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의리 있게 지냅시다.’
![]() |
| ▲고광률은 "선과 악,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극우 이념을 상수(常數)로 삼고 세상을 자기중심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골수 '파랭이'가 ‘빨갱이’를 감별하는 시각이 흥미롭다.
“사회주의는 권력의 남용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의를 추구한다고 보지도 않거니와,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사회주의는 구현되지도 않았다고 본다. 중국은 다수가 집단 운영하는 체제이고 북한은 일인 독재 세습 체제다.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2권의 표제작 ‘잃어버린 정의를 찾아서’에서 ‘그동안 판을 깔아주고 삥을 뜯어온 놈들은 빠지고, 깔린 판에서 논 놈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과 다를 바없는 짓거리’를 하는 주체로 교육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을 가지고 떠드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다. 이걸 줄곧 강조하는 곳이 교육부다. 이것으로 대학을 통제하는 거다. 오래전 유명 사학 두 곳이 교육부 재정 지원을 거절하고 자유를 누리려다가 된통 당한 적 있다. 모든 인허가나 통제의 법적 권한을 교육부가 행사한 것이다. 교육부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다.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입학 재원이 줄어들면서 몇년 전부터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교육부가 정원조정을 자율에 맡기겠다고 했다.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자율에 맡긴 게 아니다. 지방 사학이 무너지는 와중에 서울 지역 대학은 편법으로 증과 증원시켜주었다. 교수들이 교육부나 정치권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자신들 것만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학습권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마저 가로채는 것 아닌가.”
-소설가 혹은 소설이란 무엇이라고 보는가.
“독자들이 읽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묘사한 것은 실제 현실의 40%에도 못미친다. 어떤 모순이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 같은 게 없었다면 아마 소설을 안 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엄청나게 올바른 삶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남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것들은 본능적으로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소설이란 업튼 싱클레어의 책 제목처럼 ‘힘의 예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삶을 벗어나서 있을 수 없는 거다. 부끄러움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삶 속으로 들어가 표현해야 한다.”
![]() |
| ▲고광률은 "나는 학생과 교직원으로서 ‘작은 대학’들의 세계를 43년 동안 유심히 깊게 들여다봤다"면서 "앞으로 우리네 대학의 이와 같은 호시절과 사양기(斜陽期) 는 다시 겪을 수 없는지라, 미래 쓰임새를 생각해 꼭 기록해 두고 싶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고광률은 오랫동안 매달려온 ‘대학’ 관련 소설은 이제 일단락을 짓고 한국전쟁 초기 노근리 사태를 다룬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고 했다. 아울러 2차 단종 복위 사건을 중심으로 금성대군 이야기를 청소년 소설로 완성할 계획이기도 하다. ‘소설 노동자’를 자처하며 쉼없이 글밭을 일구어온 작가의 말.
-내게 소설은 노동요이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여기’에서 안 쓰면 영원히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강박의 결과였다. 글을 밥 먹듯이 똥 싸듯이 생각하며 쓰는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노동요를 부른다 생각하며 썼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