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세력이 헝가리 왕가의 혈통 지닌 노인 찾아내 벌이는 소동극
노년의 삶에 대한 무거운 성찰과 한 마리 개에 대한 지극한 사랑
"만원 전철 안에 네오나치 한 명만 있어도 감염되기에 충분하다"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 …지금까지 뜨거웠던 것이 이제는 차갑고, 지금까지 달아올랐던 것은 꺼져버렸다, 삶은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나는 거기에 관심도 없다, …종말이여, 오라, 뭐가 대수인가, 볼 것은 충분히 보았고, 족할 정도로 투쟁했으며, 몸속에서 피와 림프와 근육과 신경은 그만하면 되었다 할 정도로 자기 일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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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세 생일을 맞아 '죔레는 거기에'를 발표한 헝가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은행나무 제공] |
92세의 노인이 이제 그만 자신의 생에 불을 때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고 자신의 관심마저 꺼져버렸다고 되뇐다. 한마디로 살 만큼 살았고 아무 희망과 욕망도 없으니 조용히 심장이 멈추기만을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이 노인에게 일군의 무리가 찾아들어, 당신이 우리의 왕이니 당당히 나서서 나라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고 왕관을 써달라고 청한다.
문제는 이 추종자들의 면면이다. 평화적인 군주제 재건론자부터 무기를 모아 무장 봉기를 꿈꾸는 극우 민족주의자, 음모론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이른바 '헝가리판 네오나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세력이다. 작가는 헝가리 근위대, 고대 헝가리교 등 실제 존재했던 극우 집단들의 명칭을 소설 속에 배치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집단적 망상이 어떻게 폭력과 결합하는지 묵시록적 유머로 풍자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László Krasznahorkai)의 신작 장편소설 '죔레는 거기에 Zsömle Odavan'(김보국 옮김·은행나무)는 자신들만의 망상에 빠진 이들이 한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그 구조적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여기에 노년의 삶에 대한 성찰이 가세하고, '죔레'라는 개에 대한 쓸쓸한 사랑이 서글프게 흐른다.
숨겨진 헝가리 왕가의 혈통 '요제프 1세'임을 자인하는 노인은 자신을 그냥 '요지 아저씨'라고 부르라 한다. 전기 기술자로 생계를 이어오면서 산꼭대기에서 살고 있는 요지 아저씨는 순수한 애국심과 도덕의 상징으로 '왕관'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왕을 추대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세력이다. 이들은 수십 년간 족보와 고문서를 뒤진 끝에 요제프가 헝가리 아르파드 왕가와 칭기즈 칸의 후손이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나타난다. 누군가를 '왕'으로 추대해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하려는 대중의 무지와, 그 무지를 발판 삼아 권력을 찬탈하려는 세력이 결합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죔레'는 요제프가 기르는 개다. 요제프는 평생 키운 모든 개에게 '빵뭉치'라는 뜻의 '죔레'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그에게 죔레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나누어 가진" 존재이며, 세상과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정서적 연결고리다.
'그래, 마음껏 뛰어라, 내 사랑, 실컷 뛰어라, 아직 젊으니 움직여야 한다, 네가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는 바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유일한 살아 있는 사랑이고, 나에게는 너 하나뿐이야, …그래, 그래, 그 귀여운 얼굴을 자기 얼굴로 끌어당겨 한 번 더 흔들어주었고, 마침내 놓아주자 죔레는 다시 기쁘게 비탈 아래로 달려갔다가, 다시 위로, 또 돌아왔다,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 역시 사랑했다,'
죔레라는 개가 죽으면 다시 강아지를 데려와 같은 이름을 붙였고, 그렇게 '죔레'라는 이름은 33년 동안 노인 곁에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요제프라는 노인은 숨겨진 왕가의 혈통으로 750년 동안 '죔레'처럼 하나의 존재로 살아온 셈이다. 왕가의 복원이란 강아지를 키우는 것 같은 양상이라는 아이러니와, 그 개가 사랑의 유일한 대상으로 남은 서글픔이 복합적으로 배어나온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신작 출간을 계기로 나눈 공개 대담에서 "내게는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서 "나에게 그 노인과 죔레는 한 존재와 같고 둘 다 너무 사랑하게 됐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이 상황을 연극에 비유하면서 배우는 무대에서 울지 말라고들 하지만 자신은 "무대 위에서 계속 울고만 있는 배우"도 상상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집단적 광기에 휘말려 수사기관에 체포되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비극 속에서도, 노인이 끝까지 절규하며 찾는 것은 왕좌가 아니라 개 '죔레'다. 가족조차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며 방치하는 고독 속에서, 죔레와의 이별은 곧 자아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한다.
'죽음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게 준 기쁨보다 훨씬 더 많은 슬픔을 남긴다는 것을 큰 욕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오, …이 아름다운 인생의 끝은 결국 엿 같은 거요, 막혀버리는 것, 말하자면 꼼짝없이 조여드는 것이오. 결국 우리는 그 끝에서 막다른 데로 몰리게 되니 빠져나갈 길은 없소'
노인의 독백은 슬픔을 넘어 실존적 절망에 이른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전 작품들에서 묘사했던 '빈곤(연대가 존재하는 결핍)'과 달리, 오늘날의 '비참함'은 파편화된 인간관계 속에서의 '철저한 고립'이라고 진단한다. 화려한 콘크리트 도로가 깔려도 이웃과 단절된 채 원자화된 고독 속에 갇혀 지내는 현대인의 초상이 지친 92세 노인에 투영돼 있다.
이 소설에서 노인의 모델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에서 가져왔는데, 그는 말미에 "이 책은 상상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로도 현실의 일부로서 이번에도 현실로부터 양분을 얻고 있지만, 간접적으로 양분을 얻은 그 현실과 이 작품은 여기에서 읽히는 예술적 형식 안에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밝혀 놓았다.
수전 손태그로부터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은 작가답게, 이번 작품 역시 그의 독보적인 문체가 빛을 발한다. 쉼표로 연결된 단 하나의 문장이 한 개의 장을 이루는 특유의 만연체는, 마치 끊이지 않는 호흡처럼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실제 삶은 끊어짐이 없는데 문장에서는 마치 현실이 그러한 것인 양 마침표가 존재하는 형식을 거부한다. 그가 마침표 대신 쉼표로, 행갈이 하나 없이 문장을 이어가는 맥락이다.
노벨위원회는 그의 문학이 "종말론적 공포의 한가운데에서도 예술의 힘을 재확인해준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소설 속 요제프가 겪는 부조리한 대관식 소동과 수감 생활은 블랙코미디처럼 우스꽝스럽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몰락을 끝까지 응시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번 한국어판은 전 세계에서 최초로 번역된 외국어판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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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만들어낸 소설 속 '요지 아저씨'는 한편으로는 돈키호테처럼 이상을 꿈꾸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이지만, 생의 마지막에는 강아지 '죔레'밖에 남지 않은 쓸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은행나무 제공] |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스웨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는 취약하며 무지한 대중이 권리라는 무기를 들고 있다"면서 "만원 전철 안에서 네오나치 한 명만 있어도 (감염되기에) 충분하다"고 일갈했다. 그는 "네오나치들은 히틀러의 과거와 동일시하는 것을 좌절감에 대한 약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독이며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고 덧붙였다. 소설 속 요제프를 '발견'하여 이용하고 버리는 군중은 바로 이들을 포함한 '길 잃은 세대'를 상징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노인은 죔레를 껴안고 정신병동 창틀 위로 올라선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전야의 흥겨움을 알리는 아바의 '김미(GIMME)! 김미! 김미!'가 흘러나온다. 희망이란 없다는 디스토피아적 결말 그 자체로 예술적 충격을 독자에게 주면서, 역설적으로 희망과 각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묵시록이다. 다시는 불을 때지 않겠다던 노인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때, 죔레가 밤에 춥지 않도록 덮어주고 잠자리에 들면서 중얼거리던 말.
'오늘은 힘든 날이었다, 아니, 사실 힘들지는 않았고 다만 세월이 무거워졌을 뿐…, 하루가 다 찼다, 잘되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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