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반도 미래 운명의 변곡점을 찍을 역사적인 날이다. 수출국가 한국의 운명을 건 한·미 관세협정이 긴박한 밀고 당기기 끝에 드디어 타결됐다. 21세기 패권국가의 지위를 놓고 경쟁 중인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두 번째 만나 공수(攻守)의 완급을 조절하는 협상을 벌인다. 한국이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우뚝 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우리 땅에서 이렇게 큰 국제 외교장터가 열린 적은 없었다. 그것도 천년왕국 번영을 누린 신라의 고도(古都)에서. 이제 겨우 광복 80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오래 지속할 성장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지 시험대에 든 느낌이 들 정도로 여러 의미에서 상징적인 빅 이벤트이다. 전 세계 거물들의 회동으로 슈퍼위크라 불리는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의 이번 주 관전 포인트를 기정학(技政學)의 시야로 몇 가지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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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의 기정학(技政學) 관련 이미지. [챗GPT 생성] |
첫째, 이재명 대통령의 핵추진잠수함 요청과 트럼프 대통령의 원칙적인 동의이다. 한·미 관세협정의 성패에 대해서는 시비가 있을 것이다. 당초 요구받은 3500억 달러 전액 현금투자에서 2000억 달러는 현금으로, 1500억 달러는 조선(造船) 협력 '마스가'로 나눈 건 성과라 할 수 있다. 철강을 제외한 자동차와 반도체, 의약품 등의 관세율이 일본 내지 대만 수준으로 조정되고, 농수산 추가 개방은 저지한 점도 돋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강인한(very tough) 협상가"라고 추켜세운 걸 보면 한국 팀이 나름 최대치로 방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 대통령이 작심하고 정상회담 모두발언을 통해 재차 요구한 잠수함 핵연료 항목이 더 크게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공공연한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한국 일각에서는 핵 무장론까지 대두하는 마당에 예민한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더욱이 11월 1일에는 한·중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의 기존 국제안보전략은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고 말했던 이 대통령의 속내는 무엇일까.
한국 잠수함의 기동능력 확장은 자주국방 능력을 증대하는 동시에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력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다. 프랑스처럼 저농축우라늄 연료를 이용한 핵잠이라면 무기 전용의 위험도 적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도 "한·미동맹이 억지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핵 운용 능력 확장에는 장애물이 많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비롯해 원자력발전소 폐기물 처리에 대한 국민 공감대도 넓혀야 한다. 그러려면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포함한 원전 정책의 명확한 입장 정립이 요구된다. 한국은 원전 설계부터 시공까지 원전 산업의 전 주기 실적에서 검증을 받은 원전 강국이다. 이미 확보된 기술을 국력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기술=국력'인 시대에서 후진국으로 밀릴 것이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연설에서 언급한 양자, 인공지능(AI), 바이오, 암호화폐 등의 첨단 과학기술의 중요성이다. 트럼프 연설의 태반은 자화자찬에 가까운 업적 자랑이었지만 세계 최고 지도자가 어려운 첨단기술의 명칭과 역할, 자국 우위 통계를 줄줄이 나열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기술전쟁(Tech War)'이라 불리는 미·중 간 군사·경제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구호뿐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한 국가의 군사력, 경제력 등 동원가능한 자원이 국력의 크기를 좌우한다는 건 낡은 주장이 됐다. 과학기술은 이제 좁은 연구실에서 벗어나 지구촌 전체의 정치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핵심동인으로 자리잡았다.
지도층의 절반가량이 이공계 출신이고, 국가역량을 총동원한 과기 진흥정책으로 급부상한 중국이 이를 실증하고 있다. '만만디' '짝퉁천국'이라며 무시하던 한국인들은 얼마 전 '의대에 미친 한국, 공대에 미친 중국'이란 모 방송사의 다큐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기술에 올인하는 국가전략의 무서움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대륙간탄도탄과 순항미사일 기술 개발에 목을 맨 북한을 지척에 둔 우리는 더 오싹했을 것이다. 다행히 희망적인 통계가 하나 나왔다. 2026학년도 수시 지원자 분석 결과, 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의 지원자가 최근 5년 중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의과대학, 약학대학 등 의약학 계열 수시 지원자는 같은 기간 중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자연계열 상위권 학생의 의대 쏠림 현상이 완화되는 흐름이 이어질지 주목된다.
셋째, 일본의 대미 투자금 3320억 달러가 대부분 전력 인프라 구축에 투입된다는 사실이다. 29일 공개된 '미·일 투자 공동 팩트시트'에 따르면 히타치, 도시바, 파나소닉, 소프트뱅크 등 일본 대기업들은 SMR 등 차세대 원자로를 포함해 발전소, 변전소, 송전 등 미국의 AI 산업 육성에 필요한 전기 생산에 일제히 참여하기로 했다. 특히,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추진 중인 신형 원자로 건설에 1000억 달러를 쏟아붓고 여기에 미쓰비시중공업, 도시바 등이 파트너로 들어간다. 히타치도 미국 GE와 함께 1000억 달러 SMR 건설 프로젝트를 같이 한다. 파나소닉은 전력저장장치 ESS에 뛰어든다. 일본은 미국의 AI 필수 인프라 가운데 제1번인 전력 생산, 그것도 원전 신규 건설에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잃어버린 40년 동안 뒤처졌던 AI와 원자력 산업에서 단숨에 미국 수준으로 올라서겠다는 '따라하기' 전략의 결정판으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원전 폐기, 재생에너지 중심 이동이란 이상적인 에너지 정책을 계속 펼 것인지 우리 당국자에게 묻고 싶다.
이번 주 전 세계의 이목은 한국 경주에 집중됐다. APEC 회의에 참석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놓고 언론의 취재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일본 신임 총리를 포함한 국빈들과 연속 정상회의를 거듭하면서 모처럼 한국 땅에서 열린 대형 외교무대에서 국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하고 있다.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지켜보며 과학기술이 국제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정학(技政學)의 함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오늘 미국과 중국의 대화가 마무리되면 한반도의 위치와 자세는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두 거인이 막강한 힘을 겨루는 마당에 한국인의 생존과 번영은 이제 경각에 달린 긴급현안이 됐다. 과거 쇄국의 정세오판 때문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자리에 먼저 오른 일본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했던 경험은 불과 두 세대 전의 일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민족은 역사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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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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