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사랑의 말, 혀 위에 올리고 얼음처럼 천천히 녹이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6-09-18 17:15:54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 '테니스나무' 펴낸 윤고은
테니스공이 라임빛 열매가 되는 사랑의 영토 비추는 빛과
바퀴벌레 같은 악플러들에게 소비되는 어두운 그림자
"사랑은 '음악비누' 같은 것, 거품으로 흐르다 기화되는"

'생의 마지막에 들을 음악을 남겨두듯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랑의 총량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설령 안다고 해도 나중을 위해 사랑을 남겨둘 수 있나? 사랑은 바라봄과 풍덩 사이의 낙차,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나중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모든 것은 현재형의 파도뿐.'


▲ 균열된 사회를 들여다보는 시선을 시적인 연애 이야기에 담아낸 소설가 윤고은. [문학동네] 

 

사랑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서 조금씩 아껴야 할까. 윤고은이 새로 펴낸 10번째 소설 '테니스나무'(문학동네)의 여자는 그 사랑이 '음악비누' 같다고 했다. 음악을 감상하면 할수록 닳아서 작아지는 그런 비누.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서 아껴 듣거나, 미래에 들을 음악이 깃들 자리까지 배려하는 그런 음악비누. 종국에는 그렇게 총량이 소진되면 사랑은 사라지는 걸까. 소설 속 남녀의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그 비유가 시적으로 확장돼 어떤 사랑으로 기화되는지 느낄 수 있다.

'테니스나무'는 생존배낭을 기획·제작하는 회사원 임미아와, 지하철 K선의 '역무원의 얼굴' 프로젝트로 채용된 인턴 한태오의 연애담이다. 열 살의 나이 차를 넘어 가까워진 두 사람은 '홍해파리', '음악비누', 테니스코트 옆 '테니스나무' 같은 둘만의 은밀한 언어를 쌓아가지만, 마라톤 대회 당일 벌어진 변사 사건의 신고 지연 책임이 태오에게 쏠리면서 관계는 온라인 여론의 표적 한복판으로 끌려나온다. 자동화된 매뉴얼 뒤에 숨는 회사, 익명의 군중이 벌이는 마녀사냥, 인간 대신 배치된 AI 팀 '전략3팀'에 오작동으로 편입된 동료 최과장의 에피소드까지 겹쳐지며, 소설은 효율과 책임 회피가 맞물린 동시대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K-북 행사 참석차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인 윤고은 작가를 전화로 만났다.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처음 쓰게 된 배경은?
"컨베이어벨트처럼 흘러가는 사회에서 우리의 현재·미래형 계획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개인의 욕망까지도 자동화돼서 흘러가는 느낌이다. 동시대에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것들을 쓰는 게 소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한민국은 그 속도감이 전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회여서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기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 벨트 위에서 누락되고 교체되는 인물들에 관심이 많은데, 이번에는 그 인물들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풀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시스템 전체를 두고 썼다면, 이번에는 거기서 툭 떨어져 나간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인물들이 더 가까워지면서 예측 못하게 어떤 슬픔 같은 게 크게 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은 '음악비누'처럼 닳아 없어지는 건가.
"아니다. 음악비누를 처음에는 되게 슬프고 허무한 것처럼 주인공이 느끼는 걸로 썼는데, 두 사람이 그 사랑을 겪은 다음에 음악비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닳아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 않나. 닳아 없어지지만, 비누 거품은 물을 타고 계속 흘러갈 것이고, 강과 바다로 흘러가면 다시 기화돼서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 사이로만 보면 이들은 헤어진 게 맞지만, 그 사랑을 통해서 사실은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사랑의 힘을 더 애틋하게 믿고 싶어진 사람 같다."

-난관에 부닥치면 시간을 되돌려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홍해파리'가 흥미롭다.
"홍해파리는 생존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고 여기면 자기만의 신비한 방식으로 성장을 멈추고 숨어 있다가, 원할 때 다시 시간을 흘려보낸다. 지금 세상은 너무 빠른 것 같고 나는 좀 천천히 가는 그런 방식이 좋다고 믿었던 90년대생 태오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태오가 사회적인 이슈에 휘말려서 마녀사냥을 당하게 되면서 그 홍해파리가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실제 자연환경에서 그렇게 진짜 시간을 운용하면서 생존을 다시 도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사회적인 압박이 큰 상황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이 사회적인 공격이 좀 가라앉았을 때까지 숨어 있고 싶었을 것 같다. 우리는 일시정지 버튼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풍랑을 헤치고 나아가야 되는데, 그 마음을 홍해파리에 담았다." 

-마라톤 결승점을 앞에 두고 스쳐 지나간 인물을 찾아 역주행하는 인물이 나온다. '과거를 복기하다 보면 심해어들을 깨워 수면 위로 솟구치게 한다'고 썼다.
"소설 속 인물이 풀코스 마라톤에서 1초만 더 뛰면 골인인데, 뭔가 홀린 듯 뒤로 가는 건 AI가 못 하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위일 것이다.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냥 가야 된다고 가는 거 말고, 가다가 굳이 이해하지 못할 선택을 하는 그런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생존 매뉴얼 작업 같은 효율적인 일을 하던 인물의 삶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타인과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다."

-'생존배낭'이라는 모티프는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기본적인 사회 인식이 재난이다 보니, 애정하는 사물들 중 하나가 그것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경쟁도 심하고 속도가 빠르고 위험 요소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균열을 보게 되니까, 이런 세계관에서 중요하게 등장할 수밖에 없는 소품이다. 꼭 배낭 안에 물성을 가진 걸 담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기억에도 제한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차원에서 생존배낭은 제가 삶에 대해 얘기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이고 은유이다."

'악플러들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 비슷한 심리에 기인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 혼란을 야기하고도 그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데서 오는 일그러진 희열에 중독된 이들이다. 장막이 걷히고 빛이 들이치면 그제야 바퀴벌레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군중은 극이 시작되면 주목한다. 끓어오르는 용암 속으로 떠밀 희생양을 늘 찾고 있으니까. 그 가장자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하고 잠시 안심할 자신들을 위한 제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그늘을 비판하지만, 그 그늘이 자신을 덮치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지 못한다.'

윤고은은 초기작 '무중력증후군'(2008)에서부터 대량생산되는 뉴스를 관성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비판적으로 서술해왔다. 식상한 삶에서 대공황이나 전쟁 같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소외당할 것 같은 뉴스를 바라는 행태를 풍자했다. 이번 소설에서는 정작 임미아·한태오 연인이 그 소비의 대상이 돼버린다. 이들이 매체와 악플러들의 '마녀사냥'에 어떻게 망가졌다가 균형을 겨우 찾아가는지, 연애의 형식에 촘촘히 담아낸다.

 

▲ 윤고은은 "오직 그 시절에만 포착할 수 있는 빛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돌아보는 시선은 늘 슬픔으로 일렁일렁한다"고 썼다. [문학동네]

 

-사람 얼굴은 안 보이고 자동화된 시스템으로만 전개되는 사회와, 장막의 앞뒤에서 바퀴벌레처럼 들끓는 댓글러들에 대한 비판이 통렬하다.
"새로운 뉴스를 계속 읽으면서 실제 내 앞에 직면한 문제를 잊어가는 그런 면이 있다. 첫 번째 소설에서부터 그런 뉴스 중독증 인물을 다루었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정작 사람들이 소비하는 뉴스의 중심에 서는 상황을 그렸다. 뉴스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뉴스를 소비한다고 표현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 가볍게 소비하고 지나가기를 반복하면서, 멈춰 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태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진득하게 던져야 될 질문을 던지지 못할 수 있다. 표현이 과하긴 하지만, 군중심리 속에서 마녀사냥을 하듯 잠깐 이슈에 반짝했다가 후루룩 지나가는 건 문제다."

'테니스나무'는 임미아, 한태오만이 공유하는 언어이다. 라임색 테니스공들이 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보고 열매를 떠올린 그들만의 공간에서 자라는 나무다. '테니스나무'란 그들 사랑의 식생대를 대표하는, 한 시절의 '지표종'인 셈이다. 이 소설은 윤고은 스타일로 재난이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사회를 해부하면서도, 그 중심은 시적이며 맑은 관능이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흐르는 라임빛 연애담이다. 사랑의 말을 녹이는 이토록 관능적인 '온도'.

'비밀 통로를 순식간에 통과해버린 말. 나는 그의 말을 혀 위에 올리고 얼음처럼 천천히 녹였다. 내 혀가 거기 있음을 알려주는 온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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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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