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울적한 밤, 호롱불 안에 심장을 걸어둔 듯"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6-08-21 17:08:44
인생 시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 엮은 이종민 교수
시인 41명 첫사랑 연애 고백처럼 풀어놓은 시와 이야기
시의 세계 안내하는 가교, '출간 기획 자체가 아름다운 시'
"시가 비극적 현실 개선하진 못해도 견딜 힘은 줄 수 있다"

따르라, 시인이여, 밤의 / 밑바닥까지 곧장 따라가라, / 그대의 억압하지 않는 목소리로 / 계속 우리를 타일러 기뻐하게 하라, // 시를 경작함으로써 / 저주로부터 포도원을 만들어라, / 인간의 실패를 노래 불러라 / 번민의 황홀 속에서, // 마음의 사막에 / 치유의 분수가 솟아나게 하라, / 시대의 감옥에 갇힌 / 자유인에게 찬미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_ W.H. 오든, '예이츠를 추모하며' 부분
 

▲ 전주에서 문화기획자로 열정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는 영문학자 이종민 전북대 명예교수. 시인 41명에게 '인생 시'와 그 사연을 받아 4년여에 걸쳐 단행본으로 엮어낸 그는 "아직 자기 영혼의 시를 만나지 못한 젊은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운명의 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시가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시를 붙드는 것은, 시가 비극적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해도 그것을 견딜 힘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여,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영문학자 이종민 전북대 명예교수가 영국 태생 미국 시인 오든이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죽음을 기리며 쓴 비가(悲歌) '예이츠를 추모하며' 마지막 부분을 제시하며 돌아보는 시의 정체성이다.

시가 현실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지만 절망을 견디어낼 치유의 분수 역할은 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41명의 시인들에게 그들의 첫사랑 같은 인생시에 대한 원고를 받아 엮어낸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태학사) 서문에 담겨 있다. 새삼스럽게 시의 효용을 돌아보면서, 시인들의 연애 고백 같은 첫사랑 시들을 들추다 보면, 읽는 이들도 필경 설레게 된다. 이 교수가 4년여에 걸쳐 엮어낸 이 책은 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자극해, 시 바깥에서 살아온 이들도 시의 세계에 연착륙할 징검다리로 충분히 기능할 만하다.

밖은 억수 같은 장대비 / 빗속에서 누군가 날 / 목놓아 부르는 소리에 / 한쪽 신발을 찾다 찾다 / 심야의 늪 / 목까지 빠져 / 허우적 허우적이다 / 지푸라기 한 올 들고 // 꿈을 깨다, 깨다. / 상금(尙今)도 밖은 / 장대 같은 억수비 / 귓전에 맴도는 / 목놓은 소리 / 오오 이런 시간에 난 / 우, 우니라 / 상아(象牙)빛 채찍._ 박용래, '장대비'

자신은 무조건 눈물이 많은 사람 편이라는 박연준은 울보 시인 박용래(1925~1980)를 두고 "그는 울고 난 뒤 얼굴에 남는 소금기처럼, 몇 알의 빛나는 소금 결정처럼 언어를 아껴 놓아두듯 시를 썼다"면서 "울적한데 눈물도 잘 안 나오는 밤, 그의 시를 읽노라면 호롱불 안에 심장을 걸어 둔 듯 마음이 환해진다"고 썼다.

조용미는 이상의 '꽃나무'에서 자신의 시적 자의식과 포개진 순간을 고백하고, 김기택은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에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침묵으로 말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썼고, 정우영은 백무산의 '노동의 밥'에 담긴 "피가 도는 밥"이라는 구절이 준 충격을 되짚는다. 신미나는 신동엽의 '세모 이야기'에서, 안준철은 천양희의 '직소포에 들다'에서 각각 부끄러움과 첫사랑의 감정을 읽어낸다.

송진권은 최정례의 '서천西天으로'를 "어쩌면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부장하는 명기(明器)인 것만 같았다"고 썼고, 김안녕은 송찬호의 '칸나'를 "무명의 삶을 살다 간 혼들에게 바치는 헌화가 같다"면서 "'몽롱 한 잔' 같은 시가 뜨겁게 목울대를 적신다"고 고백한다. 여영현은 이윤학의 '오징어'에서 "신화와 비루함을 함께 견딘 시인의 모습"을 보고, 진영심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생쥐처럼 이것저것 먹어 치우는 슬픔"을 읽어내며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본다.  

이들 외에도 함순례, 김용락, 박형준, 이영광, 함민복, 고영서, 문화영, 신철규, 안현미, 김소형, 류미야, 윤석정, 권선희, 권수진, 이성목, 김수예, 지연, 진창윤, 박송이, 김헌수, 김륭, 김정경, 이길상, 김명기, 석민제, 김상혁, 김언, 정동철, 천세진, 이동욱, 경종호 시인이 참여했다. 2021년 펴낸 '그 시를 읽고 시인이 되었네'에 비해 이번에는 필자들의 나이와 지역을 배려한 점도 눈에 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어떤 글들이 먹먹했는가.
"다 좋았지만 특히 젊은 여성 시인들의 글에 묻어나는 삶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인생의 우여곡절을 시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어린 후배들이어서 우리 세대보다 안정되게 잘 지나왔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서 삶의 다양성을 간접 체험하게 됐다. 그들의 경험 자체가 이채롭기도 하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시로 극복해나온 과정들을 접하면서 울컥울컥했다."

-시가 과연 비극적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해도 견딜 힘은 줄 수 있을까.
"질곡의 상황이야 어쩔 수 없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그 상태를 시를 통해서 개선하고 극복해 나가지는 못한다. '시는 인생, 삶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는 매슈 아놀드의 말을 그동안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시인들의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실감했다. 루시앙 골드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극적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전망은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시지푸스처럼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존재가 시인이라고 했다. 비극의 힘으로 비극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비극적 운명이다."

시인은 상처 입은 언어의 수호자다. 세상이 효율과 속도와 소비의 논리에 잠식될수록 시인은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더욱 필요하다. 시인은 인간이 잃어버린 침묵을 기억하고, 무심히 지나치는 슬픔을 붙들며, 아무도 듣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만든다. 시인은 현실의 승리자가 아니라 존재의 증언자다. _ '엮은이의 말'

-'자신이 획책한 비상계엄이 대국민 호소용이었다고 말하는 이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안삼환 교수의 추천사가 흥미롭다. '상처 입은 언어의 수호자'들, 어깨가 무겁다.
"현대에 오면 올수록 언어의 오염은 심각하다. 정치적 욕망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까지 지배하는 상황에서 말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 회복시켜주는 그런 역할도 시인이 해줘야 한다. 유튜브 같은 채널은 굉장히 늘어났는데, 이를 통해 언어는 더 왜곡되고 과장되면서 개인들의 판단을 혼돈에 빠트린다. 이런 때일수록 시인들이 정제된 언어로 바탕에 흐르는 리얼리티는 무엇일지, 한번쯤 돌아보게 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한번씩 황혼녘에 시 한 편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루를 돌아보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오염된 언어의 풀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시가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시들을 발견하고 찾아주고 느끼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사실 시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시를 오염시키기도 한다. 많은 시인들이 너무 쉽게 소명의식 없이 '시인'이라는 타이틀에만 집착하는 듯하다. 그 결과 시가 갖고 있던 본래적 힘이 약화되기도 하는데, 시를 너무 많이 읽으려고 욕심 내지 말고 몇 편이라도 꼼꼼하게 읽는 자세가 필요하다. 해설을 곁들인 시선집을 내는 것도 몇 편이라도 제대로 읽자는 차원이다. 많은 시를 읽어내는 건 시를 업으로 하는 이들의 몫이겠고, 일반 독자들은 아무래도 시를 잘 쓰는 사람이 추천해준 시라면 믿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 편의 시도 안 읽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적어도 이 책을 붙들게 되면 서문에 제시한 오든 시까지 합쳐 42편의 시는 꼼꼼하게 읽을 수 있다."

 

▲ 시인들이 복수로 꼽은 '인생 시인'들. 박용래를 중심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허수경, 최승자, 김종삼, 김사인, 기형도, 송찬호. [조용호, 위키미디어]

 

김사인 시인은 "마흔한 명 시인들의 내밀한 고백을 듣는 것은 그들의 연애편지를 훔쳐 읽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라고 했고, 안도현도 "이 책을 읽는 일은 시인들의 숨겨둔 연애사를 몰래 엿듣는 기분과 흡사하다"고 썼다. 독문학자 안삼환(서울대 명예교수)은 "이 기막힌 시적 네트워크를 활짝 펼쳐 보여 주려 했던 출간 기획 자체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라고 상찬했다.

이 교수는 매달 4~5시간씩 시인 한 명씩을 초청해 시집 한 권 전체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줌 낭독회'를 53회째 이어왔고, 영시 해설과 연재 중인 음악 이야기도 곧 펴낼 계획이다. 러시아 문학 전문가를 초빙한 강의와 그가 직접 강사로 나서는 '시 in 시네마'(詩 in Cinema)도 준비 중이다. 시인과 작가들을 초청해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도 자주 마련한다. 전주가 문학의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시인들의 연애편지'를 엮어낸 그의 말.

'어떤 글은 회고록 같았고, 어떤 글은 기도 같았으며, 어떤 글은 오래된 연애편지처럼 절절했다. 그 글들을 읽으며 다시 믿게 되었다. 아직 인간은 완전히 황폐해지지 않았다고. 아직 시를 읽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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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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