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종교와 '한끗' 차이, 믿음의 본질 천착
좌절된 '사랑' 매개로 공통의 꿈과 희망 탐색
"보이지 않아서 소설의 세계는 더 거대하다" -언젠가 우연히 탱크를 믿는 사람을 만난다면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그렇지만 그게 탱크의 잘못이나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 간절히 희망하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바라면서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으나,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다 끝내 절망에 졌다. 그는 절망해 떠나갔어도 그가 꾸었던 꿈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김희재는 한겨레문학상 28회 수상작 '탱크'(한겨레출판)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믿음이 언젠가는 이뤄질 거'라면서 '어떤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썼다.
"사실 믿음에 관한 화두를 오랫동안 갖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제가 모태신앙인 천주교 신자여서뿐 아니라, 뭔가 진짜 원할 때 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안에 있는 이런 갈등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특히 소설을 쓸 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항상 '탱크' 안에서 저는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표제로 삼은 '탱크'란 소설에서 설정한 기도하는 '텅 빈 공간'의 상징이다. 기자들과 만난 김희재는 "항상 어떤 믿음 안에 있었는데 그 믿음의 공간을 구체화시키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산속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그 공간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찰하며 간절히 기구하는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탱크' 안에는 신이 없다. 각자 자신을 믿고 간절히 꿈을 그려낼 따름이다.
닉네임 '둡둡'은 잘 우는 남자 '양우'의 남자친구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지만 '탱크'에 가서 기도하면 원하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둡둡과 갈등하면서 헤어졌다. 정작 둡둡의 소망을 받아들여 함께 탱크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둡둡은 떠났다. 그의 꿈을 껴안으려고 애쓰던 아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절망이 내민 손을 잡고 말았다. 양우도 둡둡처럼 떠나려 했지만 '탱크' 매니저 손부경과, 둡둡의 사연을 글로 써낸 '도선'과 얽히면서 절망을 유보한다. '탱크' 회원들은 '이제 이곳에서 꿈의 미래를 안으로 끌어온다 / 믿고 기도하여 결국 가장 좋은 것이 내게 온다'는 기도문을 공유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텅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그렇게 발견한 새로운 자아가 한 번도 내디뎌본 적 없는 세계로 자신을 이끌면 그때부터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세계에든 속할 수 있고 어떤 세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황영경'이 '탱크'를 한국으로 들여온 배경이다. 탱크에서 기도하고 나온 이들이 '기적'을 만나고 폐쇄된 커뮤니티에서 공유하는 과정에 '둡둡'도 참여했거니와, 그는 어떠한 이유로도 탱크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어기고 그 공간에서 희망이 아닌 절망의 극단으로 나아갔다. 산불마저 그 공간을 삼켰다. 동국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음악 믹싱엔지니어로 일해온 김희재는 공통의 꿈과 미래의 아름다움을 작업 현장에서 체감한다고 말했다.
"많은 종교에서 계속 말하는 게 너희가 나를 따르면 제일 좋은 걸 주겠다는 것이더군요. 자신이 기도한 것이 오지 않더라도 결국 길게 봤을 때 가장 좋은 것이 올 거라는 믿음이 기도의 본질 같아요. 공통의 꿈, 공통의 미래는 음악 작업을 하면서 진짜 많이 생각했어요. 이 작업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음악을 만들려면 정말 많은 사람이 붙어서 일을 해야 되는데 결국 원하는 건 하나거든요. 짧은 순간순간에 다 같이 모여서 공통의 꿈을 가진다는 게 되게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둡둡'은 자신의 꿈을 믿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가 남기고 간 꿈을 이루기 위해 대열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간다. 양우와 그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일차적인 꿈이겠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트랜디한 '퀴어' 포즈를 뛰어넘는다. 소설 속 공통의 꿈에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포함해 좌절된 사랑으로 아픈 이들의 소망까지 다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김희재는 '둡둡'의 죽음이 내내 걸린다고 했다.
"써놓고도 굳이 둡둡을 이렇게 사라지게 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했어요. 결론적으로는 둡둡은 꿈의 미래를 믿지 못한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한 셈이죠. 믿음의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아요. 사람들은 항상 흔들리면서 산다고 생각해요.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순간순간 변하는데 그 어떤 찰나를 견디지 못한 거죠."
애써 상실을 견디고 살아보려고 기를 쓰는 양우가 꿈을 앞당기기 위해, 그 미래를 과거로 만들기 위해 행진에 나선 이들 틈에서 어떤 이와 마주친 뒤 고개를 묻고 우는 엔딩씬은 각별히 애틋하다. 김희재의 쓰는 이유.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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