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과정서 재해 예방 부실한 데 대해 분명한 책임 물어야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앞서 예방에 대한 인식 먼저 바뀌어야 작년 9월 26일 대전 현대아울렛에서 화재사고가 났을 때 일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그날 오후 사고현장을 찾아가 직접 사과문을 발표했다.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고 어떤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무려 7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엄중한 사고여서 그랬겠지만, 재벌 회장이 사고 당일, 아직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 현장에서 직접 사과를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사고를 대하는 정 회장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후 사고 원인에 대한 경찰의 수사 내용을 보면 현대백화점그룹의 안전에 대한 인식은 거의 바닥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정 회장의 재빠른 사과가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을 피해가려는 '악어의 눈물'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안전 협의체는 열리지 않았고, 회의록은 위조
재해사고는 발생한 뒤에 수습보다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은 교과서 같은 얘기다. 그런데 현대백화점그룹은 예방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사현장이나 작업장 등 산업재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용자와 근로자로 구성된 안전·보건 협의체를 구성해 매월 1차례 이상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 이 회의를 통해 작업환경과 안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그 내용을 안전 회의록으로 남기도록 규정하고 있다. 작업 현장의 근로자들이 협의체에 참가해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는 안전 문제를 점검하고 환경을 개선하자는 의미다.
법에 규정돼 있는 만큼 대전 현대아울렛도 이러한 협의체도 구성돼 있고 안전 회의록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 2020년 대전 현대아울렛이 개점한 이후 한 번도 안전·보건 협의체를 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회의록은 존재했다. 마치 회의가 있었던 것처럼 회의록만 작성해 보관해 온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도 이 정도면 재해 예방은 거의 팽개쳐 놓은 수준이다.
재판 과정에서 예방 부실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경찰은 근 반년에 걸친 수사 끝에 지난달 29일 업무상 과실치사상, 사문서위조와 행사 등의 혐의로 현대아울렛 관리자급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재판부는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적다는 점을 기각 사유로 들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어느 선까지 적용될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안전 협의체를 운영하지 않고 회의록을 위조한 데 대해서는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또 정지선 회장을 비롯한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영진들이 현장의 재해 예방 시스템이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정말로 몰랐는지,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몰랐는지 확실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처벌 과중' 주장하기 전에 예방 조치 다 해야
중대재해처벌법은 시행 초기부터 재계의 강한 반대를 받아왔다. 처벌 위주의 법이라면서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경영 의지를 위축시킨다고 주장했다. 또 중대재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근로자들의 낮은 안전의식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물론 중대재해처벌법이 처벌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은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법의 개정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서 예방에 대한 조치는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회의록마저 위조하는 상황에서 처벌이 과하다고 운운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더구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바지사장을 내세우는 등의 회피방법만 찾는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의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KPI뉴스 / 김기성 대기자 bigpen@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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