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편파적 공감이 '괴물'을 만든다

UPI뉴스 / 2022-04-25 13:57:29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겐 적대적인 '편파적 공감'
그런 '정치적 빠'들의 공감과 사랑은 증오와 한쌍
증오 위한 공감보다 증오없는 냉정이 훨씬 아름다워
"시민들이 우물에 빠진 아이의 소식에는 눈을 떼지 못하면서 기후 변화에는 무관심한 이유는 공감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이 <공감의 배신>(2016)에서 한 말이다. 그는 "소수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감정이 다수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며 "앞날을 계획할 때는 공감이라는 직감에 의존하는 것보다도 도덕상의 의미와 예상 결과에 대한 이성적이고도 반(反)공감적인 분석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공감을 예찬하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강한 반감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블룸은 공감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도덕적 괴물'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고 한다. 공감을 하더라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선에서 그쳤으면 좋았을텐데, 블룸이 너무 나간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공감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단어로 통하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선택을 제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사회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2009)에서 이 여론조사 결과를 거론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공감이란 문제가 제기된 것은 지난 50년 동안 세계적으로 가치관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영해주는 현상이다"며 공감의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꽤 그럴 듯한 주장이긴 하지만, 동의하긴 어렵다. 공감에 대한 블룸의 메마른 분석도 불편하지만, 리프킨의 맹목적인 예찬론도 불편하다. 리프킨은 2016년 대선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이 대선의 승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2008년 대선의 승자인 버락 오바마처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나? 아니면 공감의 가치가 8년 만에 폭락이라도 했단 말인가? 혹 우리가 공감이라는 개념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문재인은 공감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이었나? 지지자들은 '그렇다'라고 답하겠지만, 비판자들은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그렇다면 공감은 편가르기의 하위 개념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닌가. 내 편에겐 무한대로 공감하지만 반대편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 우리 모두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독일의 인지과학자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감의 두 얼굴>(2017)이란 책에서 "공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막말을 많이 했던 트럼프에겐 공감 능력이 없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실은 그는 자신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감의 어두운 면은 무엇인가? 브라이트하우프트가 지적한 것 중 세 가지만 음미해보자. 첫째, 공감은 자아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공감은 흑백사고, 또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인다. 셋째, 특정인에 대한 공감을 앞세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잔인하게 공격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극렬 정치팬덤의 행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혹 주변에 이른바 '빠'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잘 관찰해보시라. 자신이 사랑하는 정치인에 대한 그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떤가? 지나칠 정도로 과잉이다. 과잉일망정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추앙하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 자신의 그런 편파적인 공감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공감과 사랑은 증오와 한쌍을 이루고 있다. 증오가 없는 사람은 '정치적 빠'가 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행을 당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 가해자를 증오하는 건 당연하지만, '빠'들의 증오는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의 증오는 오직 우리편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활성화될 뿐이다.

그래서 공감을 하지 말자는 건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증오를 발산하기 위한 편파적 공감만큼은 경계하면서 멀리하자는 뜻이다. 한국정치를 잘 뜯어보면 흥미롭지 않은가?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공감과 사랑이 반드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악마로 만들어야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공감의 편파적 과잉은 너무도 위험해 두렵기까지 하다. 부탁한다. 제발 공감하지 말아달라. 평소 훌륭하다고 여겼던 사람들마저 공감의 편파적 과잉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게 너무 무섭고 괴롭기 때문이다. 증오를 위한 공감보다는 증오가 없는 냉정이 훨씬 더 아름답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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