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아무 말' 대선공약 난무…문재인 학습효과인가

UPI뉴스 / 2022-02-07 14:19:07
전국민재난지원금 내건 민주당의 4·15총선 압승, 교정기회 박탈
해야할 말엔 침묵…부동산정책 실패에도 지지율 높은 文학습효과
"가장 적게 약속하는 사람에게 투표하라. 그게 실망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미국 정치인 버나드 바루크의 말이다. 소련 정치인 니키타 흐루시초프도 이와 비슷한 명언을 남겼다. "정치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똑같다. 그들은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그런 속성을 잘 꿰뚫어보고 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의 후보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걸 드리겠다고 경쟁하는 상황이 되면 어찌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그런 풍경을 보고 있지 않은가.

"유력 후보들의 공약 베끼기, 물 타기, 숫자 지르기 등은 낯 뜨거울 정도다. 마치 누구 낯이 더 두꺼운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지지율 올리기에만 급급할 뿐 정밀한 재원 대책이나 현실 타당성 등은 따질 때가 아니라는 듯한 태도다."(동아일보 1월 24일자 사설)

"두 후보는 최근엔 지역별로 잘게 쪼갠 동네 민원 공약, 심지어 특정 아파트 단지를 겨냥한 공약까지 내놓고 있다…후보 자신도 믿지 않는 '아무 말' 공약만 난무하는 선거판이 돼버렸다."(조선일보 1월 25일자 사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선거판은 도박판을 닮아간다. 두 후보가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포퓰리즘 공약들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은 '한번만 크게 터지면 신세 고친다'는 타짜의 심보에 다름 아니다."(경향신문 논설위원 이용욱, 1월 27일)

왜 잘게 쪼갠 민원 공약이 급증했을까? 미국 선거판, 아니 모든 선거판에서 통용되는 오래된 격언에 그 답이 있다. "유권자들에게 당장 혜택이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공격하는 건 어리석다." 유권자들에게 당장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공약은 포퓰리즘으로 비판해도 무방하지만, 구체적인 수혜자가 있는 공약은 표를 잃을 수 있으므로 비판해선 안되며 오히려 더 주겠다고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두 후보 사이에서 벌어진 이런 경쟁에 대해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김종인은 "'돈 준다'는 얘기, '개발한다'는 얘기 외에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며 "사실 후보들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라고 비판했다. 옳은 말씀이긴 하지만, 뭔가 좀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2020년 4·15 총선의 학습효과도 적잖이 작용한 건 아닐까?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코로나 긴급재난지원금 덕분이었다는 믿음 말이다. 과연 그랬던 건지는 좀더 따져볼 문제이겠지만, 민주당이 원래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재난지원금을 주려던 정부의 방침을 뒤엎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강행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게다. 선거기간 내내 긴급재난지원금에 반대하다 민심이 이미 등을 돌린 선거일 열흘 전의 시점에서 방향을 선회했던 국민의힘으로선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을지도 모르겠다.

여당에겐 달콤했지만, 야당에겐 쓴 맛이었던 재난지원금에 얽힌 추억은 양쪽 모두에게 학습효과로 남았을 게다. 학습효과의 전제는 원래 여러 차례의 반복이지만, 동물과 달리 우리 인간은 단 한번의 강한 '환희'나 '충격'만으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다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두 후보가 지역을 방문할 때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지역 공약은 어느 한 후보가 먼저 공약을 발표하면 다른 후보가 그 공약을 받아들인 뒤 내용을 더 추가하는 방식으로 발표되고 있다. '묻고 더블로 가'라는 영화 '타짜'의 명대사가 도박판이 아닌 대선판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중앙일보, 1월 18일)

그러면서도 대선 후보라면 정작 말을 해야 할 연금개혁이나 건강보험 재정 문제와 같은 국가적 중대사엔 굳게 침묵하고 있다. 이 또한 학습효과인지도 모른다. 그건 대통령 문재인도 외면하고 방치한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문재인은 무주택자들에겐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정책 대실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음에도 현재 40%가 넘는 높은 임기말 지지율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이게 정치인들에게 공약은 그냥 던지고 보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면, 이는 '문재인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우리 정치인들의 수준이다"고 했다. 당장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음미해볼 점은 있다. 부동산 정책의 대실패도 문 정권에게 "하던대로 계속 고!"의 신호를 줌으로써 교정의 기회를 박탈한 4·15 총선의 결과라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특정 유권자의 책임을 묻자는 건가? 그게 아니다. 유권자는 전지전능한 신(神)은 아니라는 뜻이다. 유권자들은 대체적으로 이성적이고 현명하지만, 그들이 늘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온갖 다양한 감정 중 특정 감정이 정치적 판단을 지배하기도 한다. 좋건 나쁘건, 선거는 그런 감정의 분출 속에서 치러지는 이벤트다. 대선 후보들과 정치인들을 맹비난하더라도, 유권자들이 조금이라도 나눠져야 할 책임까지 그들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변화도 가능해진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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