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태도 '깐깐'…정부, 시장 무너지게 두면서 세금 징수 이율배반적" 특정금융거래법 개정안에 의해 모든 가상화폐 거래소는 다음달 24일까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로부터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획득하고, 은행의 실명인증계좌를 확보해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해야 한다. 그 뒤 심사를 거쳐 금융위에 정식으로 등록해야 정상 영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고 기한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까지 신고한 거래소는 업비트 한 곳뿐이다. 업비트 외에는 빗썸·코인원·코빗 등 4대 가상화폐 거래소들도 은행 실명계좌 확보에 고전하고 있어 거래소 줄폐업이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골치 썩이는 '트래블 룰' 대응…"은행이 정부보다 더 깐깐해"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30일 "은행의 태도가 오히려 정부보다 더 깐깐하다"며 "가상화폐 거래소의 줄폐업은 이미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하며, 최악의 경우 업비트 한 곳만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63곳 중 이날 기준 ISMS 인증과 은행 실명계좌 확보까지 끝내 FIU에 신고한 거래소는 업비트 한 곳뿐이다. 업비트는 지난 20일 신고를 마쳤다.
ISMS 인증을 획득한 거래소는 업비트를 비롯해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 보라비트, 오케이비트 등 21곳이다. ISMS 인증만으로도 C2C 마켓(가상화폐 간 거래)은 운용할 수 있지만, 원화 마켓, 즉 원화 거래는 불가능하다.
18곳은 현재 ISMS 인증 절차가 진행 중이며, 바나나톡, 나인빗, 뉴드림 등 24곳은 아직 KISA에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KISA 관계자는 "ISMS 인증은 신청 후 획득까지 3~6개월 가량 걸린다"며 "아직도 신청 안 한 곳은 기한 내 획득이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ISMS 인증조차 받지 못한 가상화폐 거래소는 어떤 영업도 할 수 없어 사실상 폐업이 유력시된다.
특히 ISMS 인증을 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가상화폐 거래소의 수익은 대부분 원화 마켓에서 발생한다"며 "C2C 마켓의 수익만으로는 경영 유지도 힘들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은행의 실명계좌 확보가 필수적인데, 대부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내 4대 거래소이자 이미 실명계좌를 제공받고 있는 빗썸·코인원·코빗 등조차 아직 거래 은행으로부터 연장 계약을 얻어내지 못했다.
현재 업비트는 케이뱅크로부터, 빗썸과 코인원은 NH농협은행으로부터, 코빗은 신한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받고 있다.
그 외 거래소들은 모두 세칭 '벌집계좌'로 운용하고 있다. 거래소 명의의 법인계좌 하나만 발급받은 뒤 그 계좌를 통해 다수 투자자들의 입출금 등을 처리하는 식이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은행의 태도가 너무 깐깐해 새로운 거래소가 실명계좌를 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나마 업비트가 빠르게 연장계약에 성공한 것은 케이뱅크와 '윈-윈'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에 따르면, 케이뱅크는 업비트와의 거래를 통해 올해 2분기에만 120억700만 원을 벌었다. 이는 케이뱅크에게 적지 않은 수익이다.
또 올해 4월부터 7월까지 업비트에 신규 계좌를 개설한 사람은 총 177만5561명에 달한다. 업비트에 거래 계좌를 만들려면, 먼저 케이뱅크 계좌가 필요하므로 그만큼 케이뱅크 고객이 늘어난 셈이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업비트는 국내 가상화폐 시장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봐도 바이낸스 다음 2위"라면서 "작은 규모의 인터넷전문은행인 케이뱅크에게는 리스크를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빗썸·코인원·코빗 등의 고객 수와 거래 실적은 업비트에 훨씬 못 미치며, 이는 대형 시중은행인 NH농협은행과 신한은행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는 곧 깐깐한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은 '트래블 룰(travel rule·자금이동규칙)' 대응이다. 트래블 룰이란 자금세탁 방지(AML)를 위해 거래소 간 가상화폐를 주고받을 때 송금인과 수취인의 정보가 파악되도록 한다는 국제 기준이다.
FIU는 내년 3월부터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를 마친 거래소들을 대상으로 트래블 룰을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농협은행은 빗썸과 코인원에 특금법 개정안 시행일인 다음달 25일까지 트래블 룰 체계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신한은행도 같은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오히려 정부보다 은행이 더 깐깐한 상황"이라며 "은행은 만약의 사고가 터졌을 때 책임을 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날 퇴임한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과거 "가상화폐 자금세탁 방지의 1차 책임은 은행에 있다"며 은행이 요구한 면책 가이드라인을 거절했다. 사고가 생기면 곧 은행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니 은행 입장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트래블 룰 대응에 부산해진 빗썸·코인원·코빗은 일단 '트래블 룰 공동 합작법인(조인트벤처·JV)'을 이번주 중 공식 출범시키기로 했다. 합작법인 대표이사에는 차명훈 코인원 대표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 거래소는 힘을 합쳐서 자금세탁 방지 체계를 만들고, 의심거래 모니터링 운영 인력도 확대할 예정이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코인원의 트래블 룰 대응이 은행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안다"며 "아마 코인원이 만든 체계를 중심으로 일부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거래소 "시간 너무 촉박"…고승범 "기한 연장은 없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실제로 세 거래소가 다음달 24일까지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 연장을 받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 C2C 마켓만 운영하면서 실명계좌 확보를 지속 추진하는 방식도 있지만, 그 경우 원화 마켓을 운영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수익 감소가 너무 크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C2C 마켓만 운영하는 거래소는 규모가 대폭 축소돼 결국 폐업으로 가게 될 위험이 높다"고 염려했다. 그는 "이대로는 많아야 4대 거래소까지, 최악의 경우는 업비트 한 곳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가상화폐업계에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신고 기한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한다. 한국블록체인협회는 지난 20일 성명서를 통해 "가상화폐 거래소의 신고 기한을 유예해달라"고 촉구했다.
지난 25일에는 가상화폐 거래소 대표들이 서울 강남구의 프로비트 본사에 모여 같은 의사를 표했다. 프로비트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빗썸, 한빗코, 코어닥스 등의 대표들은 모두 기한 연장을 요구했다.
국민의힘 가상자산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창현 의원과 윤재옥 의원도 이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윤재옥 의원은 "은행연합회의 가상화폐 거래소에 위험평가 가이드라인이 올해 4월에야 만들어졌다"며 "이래서야 신고 기한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3월 특금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후 1년6개월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지만, 트래블 룰 등에 대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자세히 인지하게 된 후로는 고작 5개월밖에 안 된다는 지적이다.
윤창현 의원은 "금융위는 은행에 가상화폐 거래소의 실명계좌 발급 업무를 전부 떠넘겼다"며 "은행을 끌어들여서 기존의 신고제를 사실상 인허가 과정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가상화폐 거래소 대부분이 폐업 위기에 놓였음에도 금융위는 엄격한 태도를 거두지 않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 내정자는 지난 27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9월 24일까지 신고해야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알려온 부분"이라며 기한 연장은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밝혔다.
금융위 관계자는 폐업 등으로 인한 투자자 피해 리스크를 인정하면서도 "위험한 거래소에서 사전에 예치금·가상화폐를 인출하는 등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라"고만 조언했다. 실명계좌 등을 받지 못한 가상화폐 거래소를 배려할 의사는 없다는 뜻이다.
가상화폐업계 관계자는 "고 내정자가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가상화폐를 금융자산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히는 등 정부는 가상화폐 거래소가 줄줄이 문을 닫고, 시장이 무너져도 개의치 않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면서도 세금은 징수하려는 건 이율배반적인 태도"라고 꼬집었다.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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