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프랑스어에 가장 가까운 한국어 옷 입은 어린 왕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1-04-22 12:53:44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번역한 소설가 고종석
영미식 대화체로 바꾸지 않고 프랑스어 구조에 밀착
기존 판본과 달리 존대말과 반말도 세심하게 구분
절필선언 후 뇌출혈, 회복 후 다시 글쓰기 시도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는 한 번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반복해서 꼬치꼬치 묻는 버릇이 있다. 여우에게 같이 놀자고 제안했다가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너와 놀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어린 왕자는 줄기차게 묻는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지?' 반복된 물음 끝에 여우가 대답했다.

 

'너는 아직 나에게 수천의 다른 소년들과 같은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내겐 네가 필요하지 않고, 너에게도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너에게 수천의 다른 여우들과 같은 한 여우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리들은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고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돼.'

▲100여 종이 넘는 '어린 왕자' 한국어 번역본에 새로운 종을 추가한 소설가 고종석. 언어학을 공부해온 그는 자신의 번역본이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라 가장 다르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한국어로만 100여 종 넘게 출간된 20세기의 고전이다. 근년 들어서는 저작권이 소멸돼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여건이다. 김현 김화영 황현산 등 정통 불문학자들의 번역본이 손에 꼽히는데, 최근에는 언어학을 천착해온 작가 고종석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불어는 물론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로 오랫동안 '어린 왕자'를 읽었는데, 근년에는 코르시카어 판본으로 읽다가 새삼스럽게 저 '길들이다'는 구절에 감응해 직접 자신의 번역판본을 만들어볼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내내 비대면으로만 간담회가 진행되다가 올 들어 처음 작가가 기자들과 직접 만난 자리였다.

 

"길들인다는 게 일방적이지 않도록 생텍쥐페리는 강조한 것 같습니다. 길들인다는 건 그 대상이 사람이든 장미꽃이든 책임이 있다는 거죠. 사랑이 상호적이어야 된다는 의미겠죠. 연애할 때 써먹을 만한 대목들이 많아요."

 

단순히 '길들인다'에 새삼스럽게 감응해 그가 번역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고종석은 "'길들이다'라는 말로 상징되는, 시간에 바탕을 둔 생텍쥐페리의 '관계맺음(사랑)'의 철학, 더 나아가서 어린아이들의 단순하고 지혜로운 세계와 어른들의 불순하고 어리석은 세계의 대비 같은 것에 나는 일찍부터 공감하지 않았다"면서 "세상은 '어린 왕자'의 세계관이 가르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서문에 썼다. 그는 "이 작품이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 까닭은 '어린 왕자'가 비루한 현실과는 거리가 머나먼 환상적 동화이기 때문일 것"이라며 "내가 이 '어린 왕자'의 세계관을 맞갖잖아 하면서도 이 책을 거듭 읽어온 것은 그것이 내 아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이 텍스트는 "한국어 옷을 입은 프랑스어, 프랑스어에 완전히 밀착한 한국어"라면서 "'어린 왕자'의 한국어 결정판"이라고 자부했다.

 

그가 '한국어 결정판'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가장 뛰어난 번역이 아니라 가장 다른 번역"이기 때문이다. 기존 번역본들과 다르다고 여기는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기존 번역판이 한국어식으로 고쳐놓은 대화와 거기 딸린 지문을 프랑스어 원문식으로 되돌려놓았다는 점이다. 대화를 큰따옴표에 묶어 따로 분리하는 대신, 한 문장 안에 지문이 혼재하는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편법으로 이 책에서는 대화에 색깔을 입혀 차별화했다. 이를테면 '다들 너무 잊고 있는 거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처럼 전개된다. 고종석은 "언뜻 작아 보이는 이 차이는 단순히 구두점이나 단어 배치의 차이가 아니라, 이야기 방식의 차이"라면서 "이 책은 아마도 프랑스어 구조에 가깝게 대화와 지문을 배치한 첫 번째 한국어 번역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한국어에서는 복수의 의미가 내포된 명사에는 '들'을 붙이지 않는 데 비해, 유럽어에서는 또렷한 명사의 복수 표지를 한국어에서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모든 날들' '오억 개의 별들' '산들' '강들'처럼 '들'을 살렸다. 그는 일종의 '문체실험'이라며 "성공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시기 바란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프랑스어의 경우 경어와 평어 구분이 엄격한데, 이는 위계질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친소관계를 드러낼 때가 많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린 왕자의 말투에서 대화 상대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어린 왕자가 '허영꾼'을 만나 처음에는 존대말을 쓰다가 중간쯤부터 반말을 쓰는 것은, 허영꾼을 어린 왕자가 멸시하는 것인데 기존 번역본들은 신경 안 쓴 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는 "어린 왕자를 대명사로 칭할 때 기존 번역들은 예외 없이 '그'로 옮겼으나 일관되게 '그 아이'나 '이 아이'로 옮겼다"면서 "작품 속에서 어린 왕자는 어린아이의 세계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고종석은 절필선언을 하고 뇌출혈을 겪은 뒤 이즈음 다시 글쓰기를 조금씩 시도하는 중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1990년대 초 프랑스로 건너가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한겨레 파리 주재기자로 일했고, 주목받는 소설들을 쓰며 언어 관련 다양한 저술을 생산해온 고종석은 근년에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회생했다. 한때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던 그는 "아직 말이 어눌하긴 하지만 최근 문예비평가 타이틀로 시 해설을 써서 넘겼다"면서 "조금씩 다시 글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번역본에는 '고종석의 유럽통신' 중 황인숙 시인에게 보낸 생텍쥐페리 관련 글을 재수록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비행기 조종사로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본 생텍쥐페리의 세계관을 '페시미즘'으로 규정하며 "페시미즘이 생텍쥐페리처럼 강한 기질과 결합될 때 그것은 외향적 행동주의로 나타나고, 예컨대 나처럼 무른 기질과 결합될 때 그것은 내성주의나 회의주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면서 "회색인의 자기 변명 같기도 하다"고 자조했다. 고종석은 번역하면서 새삼스레 다가온 '어린 왕자'의 구절들에 대해 묻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을 거론했다. 돌아보니 오래 전 남산 아래 황인숙 시인에게 보낸 이 편지의 말미도 '사막의 우물'과 애틋하게 조응한다.

 

'내 정겨운 친구 인숙, 남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산이 조그만 시장을 숨기고 있고 그 시장 어딘가에 내 친구의 방이 숨어 있어서 그래, 라고 오늘 생각하고 싶어. 1994년 7월 11일 파리에서 종석.'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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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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