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그대의 붉은 가슴이 보입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0-12-30 14:52:12

신축년 한반도를 비추는 황금 햇덩이가 백두의 머리에서 솟아올랐다. 천지 아래 자욱하게 파도처럼 웅성거리는 구름바다 붉게 적시며 미명의 하늘 끝까지 충만한 서기를 쏘아 올린다. 저 밝고 맑은 백두의 황금빛은 창궐하는 역병을 압도하고, 민족의 새로운 앞날을 열어젖힐 상서로운 축복이다. 매년 매일 지치지 않고 뜨고 진다고, 모두 같은 해는 아니다. 흰 소가 끄는 신축년 정월 초하루, 흰 머리 백두대간 우듬지에서 부상하는 저 불덩이는 새롭게 타오르는 횃불이다.



"금강산 비로봉/ 밤하늘의, 사발덩이 같은 물먹은 별/ 마셔보았는가/ 그 밤하늘 마셔보았는가,// 백두의 천지 가에 서 본 일이 있는가/ 전신이 터지게/ 호수 건너편 벽 향해/ 소리쳐본 일이 있는가,// 한라, 그렇다/ 한라도 백록담/ 시로미 밭을 밟고 서서/ 보았는가,/ 천공(天空),/ 천공(天空),// 하늘,/ 하늘 흘러가는/ 하늘 소리를 들었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외치던 민족시인 신동엽(1930~1969)은 금강과 백두와 한라와 그 봉우리 위로 흐르는 하늘의 소리를 들려준다. 그는 "황폐한 땅에도 아침은 온다,/ 아득한 평야에 새벽이 열리면/ 어디서라 없이 들려오는 가벼운 휘파람 소리,/ 물 길어 오는 아낙의 물동이 가에/ 반도의 아침이 열린다"고 '금강'을 흐르게 했다.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남도의 시인 송수권(1940~2016)은 떨리는 가슴으로 저 해를 맞았다. 백두의 머리에 찬란한 왕관처럼 떠오른 저 태양을 끓어오르는 핏덩이처럼 토해내라고 쓴다. 떨리는 손으로 슬픈 이름일랑, 아픈 추억 같은 건 지워버리고 새 수첩에 새 이름과 미래를 쓰자고 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너의 사랑은/ 삼팔선(三八線)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삼팔선(三八線)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 "

 

시인들의 시인으로 군림하는 김수영(1921~1968)은 '육십오년의 새해'에서 삼팔선의 사랑을 말했다. 삼팔선 안과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일랑 너는 너의 힘으로 족쳐버려서, 그리하여 충만하고 농익은 사랑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김수영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 안도현(1961~)은 '삼팔선의 사랑'을 이렇게 숙성시킨다. 


"그대/ 마침내 해가 떠오릅니다/ 원산 청진 경포 울산 앞바다에/ 백두 한라 상상봉에/ 그대의 붉은 가슴이 보입니다/ 우리가 또 껴안고 살아가야 할/ 신천지가 보입니다/……/ 그대와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싸움이/ 우리를 이렇게 키워왔듯이/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좋은 세상에서 만날 수 없음을 믿습니다/ 사랑으로 하여/ 우리가/ 맑고 뜨거운 해로 떠오르는 날 옵니다"('사랑을 노래함')


새벽부터 천지에 오른 이들이 운해 끝에서 머리를 내민 황금빛을 숙연히 바라본다. 그 해 점점 떠올라 구름 파도 물들이고 하늘로 올라간다. 새 해는 솟았고, 새 미래는 열리기 시작했다. 맹목적인 낙관이 아닌 무거운 희망을 한 조각이라도 붙들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작은 몸짓들이 큰 희망을 일군다. 일어나서 나가라. 나가, 반도의 중천으로 떠오르는 저 해를 가슴으로 영접하라. 


KPI뉴스 /백두산 천지=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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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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