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이 시대의 야만은 일상화·제도화된 약육강식"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0-06-16 16:09:40
신작 '달 너머로 달리는 말' 펴낸 김훈 간담회
화가의 물감, 음악가의 음처럼 정제된 언어 사용
"코로나 바이러스, 약육강식 구조 심화시킬 것"

"고구려 백제 신라는 거의 매달, 매일 싸웠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떠내려갈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인간의 감성에 비친 그 시대 역사적 풍경을 그린 것이겠지요. 당시 국가들은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었는데도 그러했습니다. 그 적개심의 뿌리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열번째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펴내고 16일 서울 서교동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난 소설가 김훈. 그는 "문명이 발달했다는 작금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인류의 야만은 약육강식"이라고 말했다. [문재원 기자]


소설가 김훈(72)이 열 번째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을 일반서점용으로 최근 내놓고 16일 낮 기자들과 만났다. 말(馬)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캐릭터로 사람과 동등하게 등장해 사람들 세상의 야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판타지다. 고대 유목형 나라 '초'와 정착 농경생활의 나라 '단'이 '나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며 벌이는 전쟁이 이 소설의 기둥이다. 이 과정에서 말들이 인간의 전쟁에 동원됐다가 저항하고 탈출해 말들의 생을 따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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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장편은 먼 시원의 초원에서 벌어진 야만과, 문명이 발달했다는 작금 세상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지는 야만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약육강식"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고대국가에서부터 자비를 이데올로기 삼으면서도 무참한 살육을 쉼없이 저질렀던 사회의 관성은 '약육강식'이라는 틀에 실려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은 인간들이 약육강식을 못 견뎌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 어떤 혁명도 이것을 돌파하는 데엔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약자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고기를 강자의 먹이로 내줘야만 한다면 그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그다지 깊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이 일상화되고 제도로 고착돼 극복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코로나 시대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묻는 질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약육강식 구조가 더 심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가진 자들에게 양보하라고 인간의 선의에 호소하는 나이브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심각한 건 곧 닥칠 살인적 더위"라며 "코로나에 겹쳐질 폭염은 하층부를 강타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훈은 말을 인간과 동등한 캐릭터로 등장시킨 배경에 대해 "말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였다"면서 "말들을 통해 인간의 야만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그랜드 캐니언 인디언 마을을 방문했을 때 야생마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후일 소설로 쓰리라 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하며 "말의 속성과 역사, 인간에게 사육되는 과정, 말이 인간의 문명과 야만을 감당해나가는 모습, 여러 고대국가들의 말과 관련된 신화와 미신의 파편을 머릿속에 넣고 재구성했다"고 덧붙였다.

 

'판타지'의 속성상 상상력을 주로 동원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내가 쓰는 언어를 정보 전달이나 서사 전개뿐 아니라 화가가 물감을 쓰고 음악가가 음을 다루듯, 그렇게 정제된 언어로 사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여생의 시간을 아껴 사랑과 희망, 인간의 영성, 내 이웃들의 슬픔과 기쁨, 살아있는 것들의 표정,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앞서 '밀리의 서재' 구독자들에게 말한 바 있다.

▲ 김훈은 간담회에서 "화가가 물감을, 음악가가 음을 사용하듯 정제된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재원 기자]

 

지난 겨울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그는 간담회를 고사하다가 굳이 '작가와의 대화'라고 명명하며 이날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책을 써서 내보내면 그걸로 끝을 내야 되는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 매우 쑥스럽고 어색하다"면서 "나의 글에 관한 사사로운 정황을 말할 수야 있겠지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운을 뗐다. 이어 "이런 자리에서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인 그는 책 뒤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과거에서 아무것도 전수받지 못한 미물로서 외계에 내던져져 있다. 지하철 3호선 전동차 안에서 나는 자주 놀라고 문득 놀란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는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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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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