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탈세계화 진행될 것…다양한 동반성장 중요해져"
"케인스의 진짜 장점은 '생각의 전환'…이익공유제 도입 절실"
대담=류순열 편집국장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형들이 잠깐 와보라고 불렀다. 무심코 따라갔더니, 야구를 하는 데 한 명 모자라다고 외야수를 시킨 거다. 동네야구는 외야로 공이 잘 안 넘어가니까. 그런데 그날따라 공이 두 개나 넘어왔고, 둘 다 받아냈다. '너 야구에 소질 있네.' 형들이 바로 칭찬하더라."
정운찬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소개한 야구와의 첫 인연이다. 정 총재는 자타공인 야구광이다. 스스로 '야구 바보'라고 소개한다. <야구예찬>이라는 책을 냈을 정도다. 경제석학이지만 야구를 빼고 그의 삶을 논할 수 없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교수,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어진 이력에서 KBO 총재는 어색하게 도드라지지만 그의 삶은 경제학 만이 아니라 야구와도 늘 함께였다.
정 총재를 13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 호텔에서 만났다. 한국 프로야구는 코로나 사태로 지난 5일 무관중 경기를 시작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 야구팬의 관심이 폭발한 터다. 경기장 관중석은 텅 비었는데 실제 관중은 폭증한 것이다.
—요즘 한국야구가 '월드클래스'가 된 것 같다
"한국 야구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미국은 '빅 볼'(장타와 홈런 등 선수의 개인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야구), 일본은 '스몰 볼'(번트와 진루타 등 팀플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야구)인데 한국은 미국과 일본 사이, 일종의 '하이브리드'형 특징을 가진다. 그런 독특함 때문에 언젠가 알려질 거라고 생각은 했다. 또 한국 야구의 응원 문화는 대단하다. 일본과 미국도 다 야구가 좀 쇠퇴하고 있는 편이라, 한국의 응원문화를 배우러 오기도 한다. ESPN에서 중계를 결정한 것은 좀 놀랐지만, 어차피 알려질 것이 코로나19로 시기가 앞당겨진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야구, K-Ball도 K팝처럼 인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마크 리퍼트 전 대사는 한국에 주요 야구 경기가 있으면 일부러 와서 보는데, 미국 방송 나가서 한국 야구는 보석(gem)같은 존재라고 말할 정도다. 한국에 와서 야구했던 두산 출신 린드블럼, NC 출신 테임즈 같은 선수들이 미국 방송에 나가서 한국 야구를 알리고 있다. 재미있는 사례로, NC 다이노스가 노스캐롤라이나 팬들한테 굉장히 인기가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에는 미국 프로야구(MLB)팀이 없고, 그 지역에 공룡 화석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야구 수준이 그렇게 높은가
"우리 대표팀은 2008 베이징 올림픽, 2015 프리미어12에서 우승하고 2006 WBC는 4강, 2009 WBC는 결승까지 갔다. 2007년 일본 대표팀 호시노 감독을 만나 다음해 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 중에 어디가 이길 것 같냐고 물으니 '모르겠다'고 하더라. 전체적으로 일본 야구가 한국 야구보다 강하지만 대표팀끼리 붙으면 모를 정도라는 얘기다. 실력적으로는 이미 예전부터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온 게 한국 야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야구 경기를 묻자 정 총재는 세 경기를 회상했다. 1963년 재일교포 고교야구단과 경기고등학교의 경기, 1977년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경기, 2000년 LG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경기였다. 수십 년이 지난 경기인데도 주요 선수의 이름, 당시 경기 상황, 결과를 세세히 기억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나중에는 북한까지도 합한 동북아 리그를 만들어 동북아 시리즈에서 우승팀을 뽑고 북미 시리즈 우승 팀과 맞붙는 진짜 월드시리즈를 만들고 싶다."
내친 김에 정 총재는 '동북아 리그' 구상을 꺼내들었다. '월드 시리즈'라고 불리고 있는 MLB 결승전은 실상은 '북미 시리즈'라고 했다.
—리얼 월드시리즈를 만들려면, 한국 야구가 지금보다 더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타 리그와의 교류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KBO랑 미국 프로야구가 인적관계가 별로 없다. 2018년에 총재가 되자마자 미국에 가서 MLB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를 비롯해 관계자들을 많이 만났다. 박찬호 선수를 영입했던 LA 다저스 전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만났더니, 맨프레드를 매년 두 번은 만나라고 조언하더라. 그 해 맨프레드를 만나러 MLB 올스타전에도 갔다. 뉴욕에서 시구도 했고. 그런데 그걸로는 (총재만 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KBO 리그의 직원들과 관계자들을 미국과 일본에 많이 보내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에 연수를 다니면서 행정도 배우고, 그러다보면 우리 선수가 미국에 가거나 미국 선수가 우리나라로 오는 경우도 늘어날 거다. 롯데 자이언츠에 마차도라는 외국인 선수가 있다. 수비형 선수라고 데려왔는데 공격도 잘 한다. 그런 선수를 어떻게 데려왔을까. 미국 가서 일을 한 경험이 있는 성민규 롯데 단장의 공헌일 거다."
정 총재는 "한국야구는 베이식(기초)이 좀 약하다"며 '기본기'와 '저변 확대'를 강조했다. "한국은 고교 야구팀이 80개 정도인데, 일본은 4000개가 넘고, 또 어려서부터 실전 위주인 우리와 달리 미국, 일본은 기본기부터 철저히 가르친다"는 설명이다.
평생의 야구광이지만 정 총재의 정체성은 경제학자다.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석학이다. 코로나19로 세계경제가 질식하는 지금, 야구 얘기만으로 인터뷰를 마칠 수는 없었다. 신나게 야구를 논하던 정 총재는 코로나19와 경제 이슈를 꺼내자 진지한 경제학자로 '변신'했다.
—코로나19가 세계 경제를 멈춰 세웠다. 어떻게 전망하나.
"탈세계화가 진행될 것이다. 각국 간의 장벽이 생길 거고 결국 민족주의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국가 간 경쟁이 심해질 거다. 국가 간 경쟁이 심해지면, 국내에서 경제주체들 간에 얼마나 잘 협력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제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동반성장이 지금보다 훨씬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동반성장은 물론이고, 빈부간, 도농간, 지역간, 남녀간, 세대간 이런 식의 동반성장이 훨씬 더 중요시될 것 같다."
정 총재에게 "대표적인 케인시언이지 않냐"고 묻자 반색했다. 정 총재는 "케인스는 시장에 대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케인스의 진짜 장점은 끝없이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공황 복판에서 고전파 경제학으로는 문제를 풀 방법이 없으니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 보고, 그러다 보니 '일반이론' 같은 명저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정 총재는 "요즘 혁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정말로 사고의 혁신이 필요한 시대"라며 "케인시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케인스는 '사실이 바뀌면 생각을 바꾼다'고 했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생각의 전환'은 무엇일까
"임금은 올려야 하지만 그 때문에 소상공인들과 작은 기업들이 어렵게 되면 안 된다. 임금은 천천히 올리고, 기업들이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돈은 많은데 투자처가 없고, 중소기업은 투자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 대기업에 쌓여 있는 돈을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이익공유제다. 요새 일부 신문들은 대기업이 번 돈을 강제로 중소기업에 나눠주라는 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 그게 이익공유가 아니다."
정 총재는 "협력관계에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있는데, 대기업이 현금 결제 안 하고 장기어음으로 결제한다든가, 기술을 탈취한다든가, 납품가를 후려쳐서 이익을 많이 냈다면 이로써 피해를 본 중소기업에게 이익 일부를 나눠주라는 게 이익공유제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다 한다. 매출공유제도 있고 이익공유제도 있고 초과이익공유제도 있다."
—한국은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에 진입해 선진국 외양은 갖췄지만 내면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우선, 50-30 클럽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인구가 5000만 명이나 되는데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라고 말하는 게 더 논리적인 것 같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거다. 세계에 7개 국가 뿐이고, 인구가 4000만만 넘어도 3만 달러 넘기기 어렵다."
정 총재는 "국가 품격을 좀 더 높여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품격은 어떤가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국가 품격이 좀 올라갔다. 사재기 안 하고, 방역 잘 하는 국가로 세계적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나. 세월호 때 우리 국격이 완전히 떨어졌는데, 이번에 좀 회복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격이라는 건 국가의 품격인데, 개인의 품격의 집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이 합리적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고, 정직하게 사실을 숨기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고 묵묵히 각자의 책임을 다하며 더불어 성장할 수 있을 때 다른 선진국 부럽지 않은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거다."
◆ 정운찬은…
△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 △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 한국금융학회 회장 △ 서울대 총장 △ 한국경제학회장 △ 국무총리 △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KPI뉴스 / 정리=양동훈 기자 ydh@kpinews.kr, 사진=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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