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캔버스에 가둔 '렌티큘라 대가' 이영하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 2024-08-14 09:46:40
다양한 재료, 캔버스 양식 거쳐 독창적 '이중화면 구조' 확립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하는 작품...세계 유수 컬렉터들이 소장
올해 뉴욕 Art on Paper와 'CONTEXT Art Miami 출사표

2017년 'SCOPE Miami'에서 벽 안의 컬렉터들을 뒤흔든 한국 작가가 있다. '렌티큘라(Open Dictionary)의 대가'로 불리는 이영하 선생이다. 그가 다시 미국 시장에 출사표를 던져 현지 화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렌티큘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도안이 변화하거나 입체감을 표현하는 출력물이나 작품'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남성용 소변기(샘 Fountain)' 정도의 충격은 아니더라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는 신선한 아이디어의 힘이다. 

 

▲ 이영하 작, 김정은과 트럼프. [칼리파캘러리]

 

그래도 그는 "그저 이중구조 화면이죠"라며 깊은 설명을 아낀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인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처럼 말이나 글로 개념화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터다. 전문가들도 그의 작품을 단순 이중구조 화면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한다. 형식적 이중구조 이외에도 여러 사유의 장치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손경란 커미셔너가 "왼쪽과 오른쪽에 다른 형상이, 정면엔 두 이미지가 중첩된 묘한 그의 작품은 여러 철학적 화두를 거머쥔 근래 보기 드문 걸작들"이라고 전하는 이유도 같은 궤다.

현대미술은 자고로 장인의 시대를 지나 '아티스트'의 시대다. 단순한 기술적 재능보다 작품 속에 녹아든 작가정신이나 시대정신이 작품성의 큰 비중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작품은 단순한 아이디어의 표상을 넘어 현대미술 작품으로 뛰어난 성능을 지녔다는 게 중평이다.

▲ 이영하 작, Adam's Garden-Family I, Mixed Media,  22.5x16cm, 2006 [칼리파갤리리]

 

그의 이런 이중구조 화면 탄생은 지난한 작업을 거치며 도달한 경지다. 2004년 그는 아담의 정원 시리즈를 내놓으며 세간의 화제가 됐다. '현대인의 허상'을 '허상을 그리거나 설치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작업 공간도 캔버스에 국한하지 않았다. 캔버스를 대신해 바다와 들판을 빌렸고 재료로 종이, 동, 철, 영상까지 동원했다. 

 

그는 당시 '현대인과 세상'을 '아담과 정원'으로 치환해 작품을 쏟아냈다. 핵심주제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시간'을 잡으려 끝없이 나아가는 현대인. 하지만 여전히 뫼비우스 띠에 갇힌 우리들의 초상을 전지적 시점에서 풀어냈다. 

 

그의 이런 작업은 과거에 묻힌 것이 아니다. 현재 그가 주목하는 이중구조 화면 작업과도 통한다. 무한한 상상력과 본질에 다가서는 구도의 정신이 깔려 있다. 굳이 다른 점을 꼽는다면 당시는 세상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 작가정신의 핵심이었다면 현재 이중화면 시리즈에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양태를 거머쥔 채 '화해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 이영하 작 [칼리파갤러리]

 

그는 이런 이중화면 작업을 15년여째 이어오고 있다. 좌우로 분리된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다. 과거, 현재 혹은 미래가 뒤섞여 있다. 미학적으로 주목할 점은 피카소가 전통적인 평면에서 입체로 회화적 탈출을 감행했다면 그는 평면에서 단순한 입체가 아닌 시공간의 도약이나 중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은 특정 시간이나 특정 공간에 갇히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렇다고 작품이 뛰어난 창의적 아이디어만 지닌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기술적인 면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 한 점 완성에 꼬박 석 달 열흘이 걸린다고 하니 한편으론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절차를 거쳐 세상에 나올까. 그는 우선 캔버스 위에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손으로 직접 종이를 접어 요철(오목함과 볼록함) 같은 수백 개의 산을 만든다고 했다. 지문이 닳아도 쉴 수 없는 작업이다. 나중에 배접까지 마쳐야 작은 요철 산은 온전히 터를 잡고 나중에 닥치는 붓질을 견딜 수 있다. 그는 이런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며 작업을 시작한다. 세밀한 붓은 수백 개의 산등성이를 수만 번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그의 머릿속 표상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낸다.

▲  작업 중 포즈를 취한 이영하 작가. [세이아트(SayArt]

 

"시간과 공간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죠. 현재 작업은 주어진 평면에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녹일까'라는 고민의 결과입니다."

 

그의 말처럼 작품은 관점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프레임처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각 프레임이 별도의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앙에선 양쪽 이미지가 중첩된다. 혹자는 혼돈된 이미지에 당혹하지만 이는 시간과 공간이 중첩된,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중첩을 풀려면 관측자는 좌우 가운데 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 관측자의 결정이 실체를 만드는 셈이다. 그는 이런 점이 "관객의 협업"이라고 했다.

인물의 설정도 중요하다고 한다. 무작정 유명인을 그릴 순 없다. 시대성, 역사성, 상징성을 곰곰이 따져야 한다. 마틴 루터 킹과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중첩 이미지는 핍박받던 흑인이 하나의 주류 시민으로 등장한 미국의 드라마 같은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수십 년 차이들 둔 루터 킹과 오바마의 꿈은, 이 작품 속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중첩된 상태로 봉인됐다. 

 

▲ 이영하 작가는 종이를 요철처럼 접어 캔버스 표면을 구성한다. [세이아트(SayArt)]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연결고리는 중요해요. 더러 반대 인물을 상정하기도 하죠. 김정은과 트럼프가 대표적이죠. 두 사람이 회담장에 나설 때 지구촌의 한 사람으로 이 회담이 영원한 평화의 단초가 되길 바랐죠. 칸트의 영원한 평화처럼."

그의 작품은 대개 100호에 달하는 대형이다. 작품의 소재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작업은 유화로 한다. 아크릴로도 가능하지만 금방 말라버리는 탓에 유화가 유리하다고 했다. 색상은 시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표현 방식이다. 흑백으로 과거를, 컬러로 현재를 표현하는 식이다.

그는 최근 이중구조 캔버스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비슷한 방법을 채택하는 이들이 늘어 분쟁에 대비하려는 고육지책이라고 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작업 방식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을 남길 필요가 있죠. 물론 박사 논문에서도 '관람자가 이동하는 시점'으로 현재 작업을 학술적으로 기술했죠."


이중구조 작품은 보통 인물화 중심으로 이뤄진다. 한국 사람은 대개 인물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국내보다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먼저 주목받은 이유다.

그는 내년을 기다린다고 했다. 연구년이다. 작업에 흠뻑 취할 날들을 기다리고 있다. 늦둥이 아들 둘을 둔 이 작가는 그동안 서울과 천안을 오가면 짬을 내며 숨 가쁘게 작업을 이어왔다. 내년엔 아이들과 작품에 아예 풍덩 빠지고 싶다는 눈치다. 

 

▲ 이영하 작, 이중 화면 구조 작품 '마틴 루터킹과 오바마' [세이아트(SayArt)]

 

"작품은 대중에게 즐겁고 재밌어야 해요. 인간의 본질을 함께 공유하는 즐거움이라면 금상첨화죠." 그이 작품론은 미술작품의 본질에 대한 솔직한 고백으로 읽혔다. 그는 이런 소통의 수단에 수십 년째 매달렸지만 정작 손에 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으니 더 그렇다고 했다. 

 

그는 "내년엔 더 큰 작품도 하고 더 많이 작업하려 한다"고 했다. 2002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업을 병행했으니 작가로서 허기를 느껴왔던 걸까. 그래도 그는 "후학에게 미술을 알리는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이것도 하나의 소통이니까요"라면서.

 

그의 작품은 세계 주요 컬렉터의 품에 안겼다. 그의 작품은 현재 아부다비 왕족을 비롯해 2019년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리더 30인으로 뽑힌 페기 구(Peggy Gou), 아시아 100대 컬렉터, 중국 China Bank와 글로벌 투자 회사인 미국 Dragoneer Investment Group 등이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현재 백석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칼리파갤러리 외 12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Abu Dhabi Art Fair, SCOPE, Miami, CONTEXT Art Miami, Art on Paper, Art Central_Hong Kong, Philippines Art Fair, Asia Contemporary Art Show_Hong Kong, Singapore Contemporary Art Show_Singapore, KIAF, SOAF, ART BUSAN, DAEGU ArtFair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출품했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 Art on Paper 2024(9월5일~8일)와 마이애미 'CONTEXT Art Miami(12월 3일~8일)에 출품된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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