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위기 해법이 장시간 노동?…90% "더 할 일 없다"

박철응 기자 / 2024-11-11 17:03:48
당정, R&D 52시간 예외 담은 특별법안 발의
기업연구소 설문조사…"시간 줄어 못한 업무 없다"
헌재 "합의하면 가능? 대등한 협상력 의문"

여당이 추진하는 반도체 지원법안에 연구개발(R&D) 종사자에 대한 주52시간 근무 예외 규정이 담겼다. 하지만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의 위기 원인에 비쳐봐도 진단이 어긋나고 실효성이 떨어져 자칫 노동 조건만 후퇴할 것으로 우려가 제기된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인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은 11일 보조금 등 재정 지원과 근로시간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한 반도체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정부와 협의된 것으로, 오는 28일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한다. 

 

▲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 내부 [삼성전자 제공]

 

같은 당 김상훈 정책위의장은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특별법을 내일 주무부처와 조율된 내용으로 발의할 것"이라며 "(노사)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주 52시간 근로 시간의 예외를 인정하도록 하려 한다"고 말했다

 

R&D 경쟁력을 위해 근로시간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인 지는 불분명하다. 전략컨설팅집현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의뢰로 2019, 2020년 민간 기업 부설연구소를 대상으로 52시간 근무제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300인 이상 사업장에선 근로시간 단축으로 하지 못한 R&D 업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90%로 압도적이었다. 

 

또 기존 업무량 대비 근로시간 단축으로 수행치 못한 업무 비중에 대해서는 78%가 10~20%라고 답했다. 52시간 근무제가 R&D 혁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크지 않다는 응답이 다수였다. 효율성 측면에서 보통(45%)이거나 심각하지 않음(33%)이 78%였고, 혁신성에서도 각각 56%, 22%였다. 다만 신기술과 신제품 개발 측면에서는 심각하다는 응답이 45%, 연구자 역량 축적 측면에서 34%로 비교적 높게 나왔다. 

 

특별법은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의 전제로 노사 합의를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측의 의지대로 관철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52시간 근무제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한 바 있다. '근로자의 휴식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정착시켜 장시간 노동이 이뤄졌던 왜곡된 노동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입법 목적이 합리적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당사자 간 합의가 있더라도 연장근로 상한을 강제하는 법 조항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사용자와 근로자의 자율적 합의에만 맡겨두어서는 장시간 노동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합의 방식을 구체화한다고 해서 근로자에게 사용자와 대등한 협상력을 보장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현재 삼성전자의 위기는 한 때 AI용 반도체 HBM 개발을 등한시했던 경영진의 판단 오류가 핵심이다. 이를 R&D 종사자들의 추가 근무로 만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이미 불거진 인력 유출 문제가 심화될 수도 있다. 기술 개발보다 재무제표 관리에 치중하는 조직문화에 대한 지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CBS라디오에 출연해 "(김기남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제품보다는 기존에 우리가 잘하는 걸 더 밀어붙이면서 점유율을 더 늘려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면서 "개발자들 상당수는 이직한 케이스도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로 옮겨간 개발자들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꽤 있다"고 답했다. 

 

SK하이닉스에서 삼성전자로 옮겼다가 유턴하려는 직원들을 일컫는 '하삼하'란 조어가 회자되기도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20년가량 일한 익명의 엔지니어는 언론을 통해 조직문화를 꼬집으며 "52시간제가 문제라면, 52시간을 꽉 채우고도 일을 더 하려는 사람이 90%는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일하고 싶은데 시간이 차서 못 하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젊은 인력은 크게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CXO연구소가 삼성전자의 글로벌 인력 변동 현황을 연령별로 분석한 결과 2015년 20대 직원 수가 58.9%(19만1986명)에 달했으나 지난해에는 27.1%(7만2525명)까지 낮아졌다. 40대 이상은 지난해 8만1461명으로 20대보다 처음으로 많아졌다. 인력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노조는 노동자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 전국삼성전자노조는 최근 성명을 통해 "법적으로 보장된 근로시간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근로시간을 더 늘리려는 시도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라며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원인을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에서 찾기보다는 경영진의 전략 부재와 무능을 성찰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도 부정적이다. 이재명 대표는 이날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찾아 "'집중적인 연구 개발이 필요한 영역들은 노동시간을 통제해놓으니까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것은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불리하다'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 필요한 계산을 하는 게 바람직한데 전체 제도를 통째로 바꿔버리면 잘못 사용돼 노동자 노동환경이 전체적으로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KPI뉴스 / 박철응 기자 hero@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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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응 /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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