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사소송 법정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이다. 말 그대로 커버(장막)를 제거한다는 의미다. 재판이 열리면 원고와 피고는 소송에 돌입하기 전에 판사에게 상대가 요구한 문서, 이메일 등 증거자료를 미리 제출해야 한다. 재판 중에는 원칙적으로 이 증거범위 내에서 공격과 방어를 하고, 나중에 증거를 추가하려면 판사의 엄격한 심사와 허가를 거쳐야 한다.
한마디로 싸움하기 전에 각자의 무기를 심판 앞에 다 펼쳐놓고 그 무기로만 싸우라는 것이다. 등 뒤에 숨겼던 칼을 갑자기 꺼내 반칙하지 말라는 뜻이다. 로마 검투사부터 중세의 신사 결투에 이르기까지 공개된 무기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던 전통이 법정으로 이어진 모양새다. 영미법계 법리(法理)로 무기평등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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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 이미지. [챗GPT] |
이와 똑같진 않지만 우리나라 법정에서도 디스커버리와 유사한 증거제도를 채택하려는 입법이 국회에서 이어지고 있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K-discovery) 도입을 골자로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김정호·고동진·서일준·송재봉 의원이 각각 특허법 일부 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이중에서도 특허법 개정안은 민사·형사 등 본격적인 대형 법적 분쟁에 앞서 보다 작은 규모로 한국형 증거수집제도의 적실성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실험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허 분쟁은 보통 피해자인 중소벤처기업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인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 실제로 벤처기업협회 정책연구팀이 지난 7월 44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특허침해소송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기업 중 가장 많은 28.4%가 소송 과정의 주요 애로사항으로 '증거수집의 어려움'을 꼽았다. 2023년 중소기업중앙회가 3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기술을 빼앗긴 업체 중 43.8%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그 이유로 78.6%가 '기술탈취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워서'라고 응답했다. 이들은 자료제출명령제도 등 피해입증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국회에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특허법 개정안이 봇물처럼 몰린 것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기술을 탈취한 기업은 망한다는 대원칙으로 입법과 정책 집행은 물론, 사회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겠다"는 공약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이와 함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을 위한 상생협력법안도 국회에 올라와 있다. 국회에 상정된 특허법 개정안은 여러 개이지만 취지는 비슷하다. 기술 유출·탈취 소송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대기업에 기술을 빼앗기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중소기업 원고가 막강한 대기업 피고로부터 제대로 된 증거를 수집하려면 판사의 감시 아래 증거보전, 증언녹취, 전문가 사실조사 등이 보장돼야 재판다운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요구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조사받는 기업의 핵심기술 유출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소송 남발, 공동개발 위축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법조계에는 여러 후진적 관행이 남아있어 기술이 국력인 '인공지능(AI) 3강 국가' 진입 목표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첫째 판결문 비공개, 둘째 소송 지연, 셋째 불공정한 재판절차다. 판결문은 민·형사를 포함, 가정법원과 특허법원까지 모두 공개율이 30%를 넘지 않는다. 개인의 사생활보호 등 일부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국가 사법제도의 결과로 형성된 재판기록은 국민에게 투명하게 되돌려주는 게 원칙이다. 대형언어모델(LLM)과 같은 첨단기술의 학습재료로 쓰일 고급 텍스트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거북이 재판'도 국민 불만 중 하나다. 법관 수 증원과 집중심리제 등 제도를 개선해 느려터진 정의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정 재판을 위해 100% 미국식 디스커버리가 아니더라도 독일 대륙법계의 전문가 증거조사 등 증거의 무기평등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게 받아들일 때가 됐다.
자료보전 명령(litigation hold)은 소 제기 전 단계에서 증거 삭제를 방지하기 위한 미국 법원의 권한이다. 80% 이상의 침해가 이 단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꼼짝 마' 요구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특허법에도 현재 자료제출 명령은 있지만 자유 심증주의 원칙 때문에 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전문가 사실조사이다. 독일, 일본의 제도를 참조한 제도인데 △ 변호사 법률의견서 포함 여부 △ 조사결과보고서 공개 대상자의 범위 등에서 세부적인 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증언녹취(deposition)는 법정에 나오지 못하는 참고인의 진실한 진술을 확보할 수 있는 증거보완제도이다. 분쟁 초기에 주요 증인 신문을 통해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사건 쟁점을 분명히 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조기종결로 이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의신청 규정 신설이나 위증죄 적용 등 보완입법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다른 여러 쟁점이 있으나 여기서 다 논의하진 않겠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의 도입 움직임을 놓고 경쟁자인 글로벌 다국적기업에 공격 빌미를 준다든가, 아직 시기상조라든가 반론이 분분하다. 하지만 특허 선진화를 위해 반드시 건너야할 강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AI 3강 국가를 주장하면서 남의 기술을 훔치거나 베끼는 범죄를 그냥 놔둬선 안 된다. 깜깜이 재판, 기울어진 운동장 재판을 넘어 우리나라 민사, 형사 법정에서도 평등한 무기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이는 멋진 K-드라마와 영화 같은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전단계로 특허법정에서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 발명자가 통쾌하게 아이디어의 승리를 맛보는 장면이 예고편으로 나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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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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