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잘 늙는 일이 쉽지 않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4-02-26 13:22:59
신작 시집 '고독의 능력' 펴낸 이재무 시인
늙어가면서 찾아드는 고독의 실체 마주하기
'인연·우정·연애의 협착', 완쾌될 수 있을까

잘 늙어간다는 건 어떤 상태를 이르는 표현일까. 좀 더 인내심이 생기고 관대해지며 고독에도 익숙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건가. 젊은 시절에는 그리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작 노년에 접어든 이들은 당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재무 시인의 신작시집 '고독의 능력'(천년의시작)은 잘 늙어가는 일의 쓸쓸한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는 이례적으로 시집 초두에 길게 배치한 '시인의 말'에서 먼저 고백하고 시작한다. 

 

▲ 새 시집을 펴낸 이재무 시인. 그는 "우리들 어둡고 구차한 생활에도/ 소소한 기쁨의 알겯는 소리/ 들려올 일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잘 늙는 일이 쉽지 않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년처럼 벅차다. 그저 나이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지혜로운 어른으로 여유를 만끽하며 살 줄 알았다. 욕망을 비우고 허허롭게 관조하며 살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래된 귤처럼 즙이 빠져나간 거죽은 딱딱한 채 몸체는 오그라드는데도 욕망은 구멍처럼 팔수록 커지고 그런 욕망이 징그러워 애써 저만큼 밀어내면 이번엔 권태의 오랏줄이 영혼을 칭칭 감아 왔다.

그는 "잘 늙는다는 것, 고산을 쉬지 않고 오르는 일처럼 고된 일"이라면서 "지금의 나는 젊은 날의 내가 그리던 내가 아니"라고 돌아본다. 이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 자랑, 자기선전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는 노인뿐, 어른다운 지혜와 겸손이 없다"고 한탄한다. 그는 '협착증'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자각한다.

협착증이 와서 이곳저곳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흰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생활의 협착을 떠올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면서 "인연의 협착, 우정의 협착, 연애의 협착/ 퇴화성이기도 하고 자세 불량이 원인이라는/ 협착이 나를 고무하고 학습시킨다"고 깨닫는다. 그 협착이 "완쾌되면 너와 나, 관계가 원활하리라"라고 시인은 희망하지만, 과연 완쾌될 수 있는 것일까.

쓸쓸한 밤이다. 살아오는 동안 협량한 성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곁을 떠났다. 죽고 못 살겠다던 사랑도 떠나고 강처럼 깊던 몇몇 우정도 저만치 흘러가고 세계에 대한 메꿀 수 없는 인식 차이로 강철 대오 짓던 동지들도 철새처럼 떠났다. 하지만 애써 눈물 감추며 떠난 이들을 돌아보지 않으련다. 너무 멀리 걸어왔으므로 얼마 남지 않은 미래를 위해 땀 흘리며 걷겠다. 낯선 길에서 새로운 사랑도, 우정도, 동지도 생겨나리라.
_'쓸쓸한 밤' 전문

쓸쓸한 밤을 지나 화사한 봄날 산책을 나가도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다 간 사람들'이 아득하게 뛰어든다. 낮술에 취해 탁자 두드리며 뽕짝을 부르고 있을 박영근이, 극장 캬바레 여인을 찾고 있을 김남주 선배, 박찬, 김이구, 정영상…. 시인의 고독은 점입가경이다. "하나둘 친구들, 애인들 떠나고 있다/ 누구의 잘못도 없이 멀어지고 잊혀 간다/ 술과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도/ 옛말 된 지 오래다/ …/습관은 바꾸기 힘든데 세상은 변화를 윽박지른다"('강화일기 4')

시인은 고독을 학습하기 위해 숲에 들어 "도열한 잡목들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기며 신의 숨결을 듣는다"('고독의 능력')고 쓰고 "자기 시대에서만 친구를 찾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니체).// 노자, 장자, 사마천, 원효,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니체, 카뮈, 메를로-퐁티, 박지원 등을 친구로 삼아 볼까?"('친구')라고 궁리해보지만, 그 고독이 쉽게 물러날 상대인가.

몸속에 쥐 한 마리 살고 있다. 자라는 송곳니가 가려운지 무릎 연골을 파먹다가 우당탕탕 이마 속 천장을 뛰어다니는 통에 자다가 수시로 깨기도 한다. 약을 먹었는지 충혈된 눈이 방바닥을 노려볼 때도 있다. 힘들게 일어난 아침이면 영혼의 이불에 오줌 자국 얼룩덜룩하다. 몸속에 두근거리는, 한 마리 불안이 살고 있다.
_'불안' 전문

고독을 직시하고 대처하는 지난한 노력이 시인 특유의 솔직한 어투에 실려, 널려 있는 고독을 새삼 응시하게 만드는 시집이다. 이러한 정조 외에도 이재무 특유의 예리한 관찰과 재담이 돋보이는 시편들도 여전하다. 소면은 일직선으로 따로 놀아도 끓는 물속에서 곡선이 되어 하나로 결속하지만, 차돌처럼 단단해보이는 라면은 펄펄 끓는 물속에서 그 대오가 "시지부지 흩어지고 무너진다"고 적시한다. 그가 "국수와 라면은 우리시대의 기표"('소면과 라면의 차이')라고 규정한 배경이다. 이런 익살은 어떤가.

아내와 각방 쓴 지 스무 해가 넘는다. 미니 별거인 셈이고 스몰 졸혼인 셈이다. 각방이 서운키도 하다만 편리할 때도 있다. 내외하며 살아도 챙길 것은 챙긴다.// 오늘은 빨래하는 날, 탈수된 빨래들 세탁기에서 꺼내니 아내의 브라와 내 팬츠가 한 몸으로 엉켜 있다. 잘 떼어지지 않는다.
_'부부' 전문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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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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