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으로 포장, 스스로 분노 정당화
'분노의 확신'보다 '이해의 겸손'이 용기
'분노의 원천은 확신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강렬하게 각인된 문장이다. 평생을 법과 질서, 그리고 '악인'에 대한 확고한 기준 속에서 살아온 자베르는, 장발장의 선의를 목격한 후 그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확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분노가 아닌 허무와 좌절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베르와는 반대의 길 위에 서 있는 듯하다. 확신이 없는 분노, 또는 잘못된 확신 위에 선 분노가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내란 혐의에 대한 법적 판단이 이어지며,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상반된 정치적 시각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증폭되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은 더 이상 합리적 논의를 위한 동기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상처와 파괴의 무기가 되고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은 기존의 국제질서와 통상 규범을 흔들었고, 자국 우선주의는 갈등과 불신의 정치로 이어졌다.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일수록 분노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사회를 마비시키는 위협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분노의 근거에 대해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종종 편향되어 있으며, SNS나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편향된 정보는 잘못된 확신을 낳고, 그 확신은 타인을 향한 비난과 분노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확신이 일종의 '정의감'으로 포장되어 스스로의 분노를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언론의 역할도 위기에 처해 있다. 객관성과 중립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이념이나 이익에 편승한 기사들이 넘쳐난다. 기자정신을 기반으로 한 탐사보도는 점점 줄어들고, 팩트보다 감정과 자극을 유도하는 콘텐츠가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더욱 '불완전한 확신' 속에서 분노하고, 그 분노는 또 다른 분열을 낳는다.
이처럼 불확실성과 정보의 왜곡이 난무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분노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정말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가?"
"내가 믿는 정보는 사실에 기반한 것인가?"
"지금의 분노는 타당한가?"
우리는 분노하기 전에 확신할 수 있는가를 먼저 되물어야 한다.
다가오는 시대의 지도자는 국민의 정서를 읽고 분노를 치유할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지금은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목소리보다, 상호이해와 타협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목소리가 절실하다. 분노의 시대를 넘어, 이해와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 모두의 자성(自省)이 필요하다.
우리가 마주한 시대는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제는 '분노의 확신'보다 '이해의 겸손'이 더 큰 용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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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준 교수 |
박성준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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