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의 인사이트] 한국의 전기요금은 사상 최대 '공짜 점심 스캔들'
임항
yh@kpinews.kr | 2023-05-18 09:22:55
전기과소비 부추기는 용도별 교차보조 폐지해야
오염자부담원칙 반영, 장치산업 절전도 유도해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상최대 공짜점심 파티가 매일 펼쳐지고 있다. 생산원가에 한참 못 미치는 요금만 내고, 상대적으로 고급에너지인 전기를 거의 마음껏 낭비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전기를 남용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주로 장치산업의 대기업과 농어촌에 훨씬 더 싸게 공급되는 전기요금 체계의 불공평성 탓에 한전과 정부, 더 나아가 국민 모두의 허리가 꺾일 정도의 위기에 처했다. 구조적 문제의 해결, 즉 전기 요금체계와 가격결정구조의 개혁을 미룬 탓에 자초한 위기다.
정부와 여당이 16일 이런 한전의 누적적자를 완화하기 위해 올해 2분기 전기요금을 ㎾h당 8원(5.3%) 인상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전기요금은 올해 1, 2분기 두 차례에 걸쳐 ㎾h당 22.1원 올랐는데 산업부가 작년 말 책정한 연간 인상 적정액 51.6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추가 요금인상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전제하에 증권가는 올해도 10조원 규모의 적자를 메꾸기 위한 한전채 발행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채 잔액은 77조2000억원으로 발행한도의 74%를 이미 채운 상태다.
더 이상 채권 발행이 불가능해지면 한전은 민영화 수순으로 가고, 전기요금은 한꺼번에 앙등한 폭탄으로 국민경제를 강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조영탁 한밭대 교수는 지난 9일 전기신문이 개최한 대담회에서 한전 적자를 "거의 말기 암 환자 수준"에 비유하면서 "내년 총선이 지나고 응급조치를 하더라도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소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전기요금도 문제지만, 시장원리와 환경비용 반영원칙을 무시한 요금체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전기요금은 사용전압, 사용시점, 사용 지역 등 소비특성에 따른 전압별 요금체계가 합리적이고, 일반적이다. 그것이 발전 및 송전원가를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기요금 체계는 소비용도(산업, 주택용, 일반용, 산업용 등)별 요금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부수립 직후에는 전압별 요금체계였지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수출주도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용도별 요금체계로 전환했다. 이후 역대 정부들은 전기요금을 산업지원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러한 용도별 요금체계가 장기화하면서 산업부문 전기의 과다사용, 환경 훼손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용도간 보조의 문제점은 소비자 간 차별과 교차보조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교차보조란 어떤 부문에서 돈을 빼앗아서 그 돈을 다른 부문에 주는 것이다. 즉 불과 몇 년 전까지 수십 년 간 산업용 전기는 원가 이하로,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은 원가보다 높게 부과됐다.
동일 용도 내에서의 교차보조도 공정성을 크게 잃고 있다. 산업용의 경우 심야 시간대의 경부하요금이 너무 낮고 피크시간대의 요금은 너무 높게 책정돼 있다. 산업용 경부하요금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사용요금에 대해 원가의 절반에 가까운 요금으로 할인해 준다. 경부하요금은 계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h당 57.1원으로 산업용 평균 판매단가 105.5원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는 기업은 주로 장치산업의 대기업이므로 경부하요금의 혜택은 주로 대기업에 돌아간다.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5년간 전력다소비 상위 10대 기업은 전기요금으로 일반기업 평균대비 4조2000억 원을 절감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정책적 목적의 특혜요금제도도 전기요금의 공평성을 해치고, 한전 적자를 가중시킨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전기차, 전기저장장치, 신재생에너지 지원 등을 위한 요금 할인액이 연간 4조원에 이른다. 한전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판매의 25.6%가 경부하시간대 적용을 받는다. 전체 전기수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54.7%)에서 발생하는 원가 손실은 특례요금과 심야할인요금의 영향을 합치면 한전 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부와 한전도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박일준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은 지난해 9월 21일 "전력 다소비기업에 대한 전기요금 원가 회수율이 70%가 안 된다"면서 "대용량 사용자에 대해 전기요금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업용 전기요금은 판매 비중(3.9%)은 작지만, 원가회수율이 25% 밖에 안 될 정도로 싸다(46.0원). 게다가 농사용은 대기업 등 기업농이 많이 쓰고, 가정용으로 빼돌려 지는 등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
현행 전기요금체계의 더 큰 문제점은 기후변화에 대한 완화정책에 역행한다는 것이다. 발전용 연료의 경우 환경오염 정도가 클수록 더 높은 세율을 부과해야 마땅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유연탄(석탄)과 우라늄(원전)에 면세혜택을 줬다. 발전용 석탄에 대해서는 2014년부터 낮은 세율로 과세가 시작됐지만, 이런 차등과세가 지금도 낮은 전기요금과 세계 정상급 전기 과소비의 근본적 원인이다.
환경문제 해결의 첫째 원칙은 오염자부담원칙이다. 전기의 생산과 소비과정 모두에서 생기는 사회적 비용과 숨어 있는 환경오염 비용을 정직하게 전기요금에 반영해야 한다. 이걸 하지 않으니까 장거리 송전망을 더 건설해야 하고, 여러 가지 외부비용(건강피해, 사회적 갈등)이 자꾸 발생한다.
온갖 왜곡을 낳는 용도별 요금제를 폐지하고, 전압별 요금제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특례요금제도도 시대정신에 맞춰 꼭 필요한 것만으로 최소화하고, 대신 정부예산에서 연구개발비 등 직접지원을 늘리는 게 바른 길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전기요금 올리기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정부는 국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전기소비자에게 요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을 허심탄회하게 설명해야 한다. 조영탁 교수는 "정부와 정치의 전기요금 개입을 축소하고, 새로운 요금결정 거버넌스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KPI뉴스 / 임항 사회전문기자 y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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