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시의 힘 믿는 이들의 느슨하고 오래된 연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3-02-05 10:42:06

'시힘' 11번째 신작 시집 '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
서정성 바탕에 둔 각각의 목소리로 조화를 추구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문학'으로 생명력 확보
시 쓰는 자세 성찰하고 새로운 서정 향하는 노정

'시힘' 동인들은 자주 만나지 않는다. 그래도 저마다의 약력에는 꼬박꼬박 '시힘' 동인이라고 쓴다. 울타리가 느슨하다. 울타리가 넓다. 그 울타리 안에는 시의 항성을 도는 별들이 뛰어논다. 멀리 있어도 서로의 빛을 읽는 별들처럼 지내다가, 만날 땐 별빛으로 웃는 행성들이 있다. _'시힘'의 말

▲1984년 결성해 40년 가까이 흘러온 '시힘' 동인들의 11번째 신작시집 필자들. 안도현, 양애경, 이대흠, 이병률, 휘민, 최영철, 정일근, 이윤학(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몰개 제공]

'동인'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문단에 이 동인 활동이 활발했던 시절이 있었다. 문학을 하는 안팎의 환경이 험난할수록 문학하는 이들이 자주 만났고 같은 지향을 확인했다. 1980년대 '동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천명하고 문학을 통해 실천하려는 연대의 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목적이 분명한만큼 시대가 변하면서 존재 의의도 희미해져갔다.

시인들의 동인 '시힘' 도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안도현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 직후 같은 신문으로 등단한 고운기한테서 동인 모임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연락이 왔고, 그의 주도로 만들어진 모임이 '시힘'"이다. 이들은 세기가 바뀌고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동인으로 남아 있다. 흩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같은 이름 아래 건재하게 만드는 이들 시의 힘은 어떤 빛깔일까. 16인의 신작시와 산문을 담은 11번째 '시힘' 신작시집 '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몰개)가 출간됐다.

"뜨겁게 달궈지던 민중문학의 시대에 '시힘'은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동인으로서의 목적과 지향점은 뚜렷하지 않았고, 동인지라는 매체로서의 전투력은 허약했으며, 세상을 향해 하나 된 목소리를 내지르지도 못했다. 우리에게 붙여진 '민중적 서정시'라는 정의는 왠지 빵꾸난 양말에 덧댄 형겊 조각 같았다. 그 시기에 민중을 전폭적으로 끌어안거나 밀어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정시의 문법을 등에 업고 있는, 엉거주춤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혹은 이것이며 저것인, 민중문학의 시대가 저물 때까지 '시힘'은 그랬다."

안도현의 말처럼 '엉거주춤한' 여지를 둔 것이야말로 각자 같은 뜻을 품되 다른 방식으로 만개하게 만든 배경일 터이다. 그는 "'시힘'은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그 어떤 '에꼴'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개개인에게 자유롭고 독자적인 영역을 마련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자부한다.


1985년 내놓은 동인지 창간호 서문에서 "우리는 건강한 삶에 기반을 두겠으며, 시의 서정성이 바탕색에 짙게 깔리도록 노력할 것"이며 "우리들의 시가 각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 결코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자각하고 충분히 존중해 줄 것"이고, "무엇보다 나 아닌 남에 대한 진정한 이해 속에서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문학이 얻어질 것이라 믿는다"고 밝힌 '강령'이 눈에 띈다.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되 각각의 목소리로 조화를 이루는 일, 무엇보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문학'을 지향한다는 목소리는 사실 문학하는 자세의 기본일 터이다. 이를 어떻게 자신만의 문학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모든 창작자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번 신작시집에는 양애경 고운기 김백겸 안도현 정일근 최영철 박철 나희덕(이상 1980년대 등단), 이윤학 박형준 김수영 문태준 이대흠 이병률(1990년대), 김성규 휘민(2000년대) 등 16명이 참여했다. '늙은' 동인들이나 상대적으로 젊은 시인들 모두 그들 나름의 빛깔을 보여준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마당과 골목에 폐지를 잔뜩 쌓아놓은 다음/ 리어카를 거꾸로 세워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놀고 있었던 것일까/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아이가 방에서 잽싸게 나와/ 담벼락에 거꾸로 기대어 세워진/ 리어카 바퀴를 신나게 돌리기 시작한다/ (…)/ 대문이 있으나 대문이 열려 있는 산동네, 아픈 옛친구 병문안 가려고 비탈길을 올라가다 우연히 들여다보게 된 폐지 줍는 할아버지의 집, 비탈길 끝 지는 노을이 언덕을 올라가다 꽃상여가 반쯤 걸려 있는 것 같은데// 아이가 바퀴살대를 돌릴 때마다/ 무심한 구름 사이로 내리는 붉은 빛이/ 회한 한숨 망각 그리움 따위로/ 빛깔을 바꾸며 정신없이 신나게 튀어나와 반짝이는 것 같은데,/ 안에서 기침을 쿨럭거리던 할아버지가/ 삐긋 방문을 열고 아이에게 밥상을 다 차렸으니/ 그만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 들린다
-박형준, '리어카 바퀴를 돌리는 아이'

박형준의 신작시는 이들의 지향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진화한 서정으로 다가온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둘이서 사는 아이, 할아버지의 힘든 노동과 그 노동의 수레바퀴를 햇살 속에서 돌리는 아이, 비탈길 노을 지는 언덕 꽃상여가 걸린 듯한 저물 무렵의 풍경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애잔한 서사로 스며든다. 박형준은 산문에 "시 쓰기 역시 세상이란 미끄러운 빙판길을 균형 잡으며 우아하고 달콤하게 헤쳐 나가기 위한 스케이트 타기를 터득해가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부기했다.

▲여타 동인들과 달리 느슨한 연대를 추구해온 '시힘'의 신작시집 필자들. 고운기, 김백겸, 김성규, 김수영, 박형준, 박철, 문태준, 나희덕(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몰개 제공]

'시힘' 동인을 처음 제안한 고운기는 세월이 앗아가버린 '사랑'에 대해 말한다.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지금은 치과 의사가 되어 늙어버린 그의 '사랑 대신 삭은 사랑니를 뽑는' 서글픈 현실을 말한다. 그는 "짝사랑도 아니고 주저하는 사랑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지막 사랑니를 뽑고 나면 이제 그마저 끝"이라고 적었다. 세월에 적응하려는 몸짓은 최근 33년만에 마산으로 '귀환했다'는 정일근에게서도 보인다.

"저는 조용히 정리되고 잊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잊히기 위한 연습 중입니다. 사람이든 시이든 잊히고 싶은 것입니다. 어머니 아직 가까이 계시니 늙어 자식 노릇이나 잘하면서 살다 가겠습니다."

오랜 타향살이 끝에 3년 전 경북 예천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마당에 돋아나는 풀들을 하염없이 뜯어낸 안도현은 세월에 소진되거나 닳지 않는 이야기, 문학의 힘을 믿는 쪽이다.

뽑아도 뽑아도 풀은 돋아납니다/ 이야기를 쏟아내도 이야기가 고이는 연못처럼 마당에는 또 풀이 고이겠지요/ 책에 밑줄 긋는 일보다는/ 풀 뽑는 일이 천배 만배나 성스러워서/ 나는 이놈의 풀을 퍼낼 바가지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중입니다
_안도현, '풀 뽑는 사람'

2000년대 등단한 휘민의 서정은 보다 싱싱한 슬픔이다. 그는 어린시절 우연히 다락에서 놀다가 어려서 죽은 언니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후 내내 '온전히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언니가 남겨준 여분의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고 산문에 썼다. 그는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하는 밤'에 문 밖의 기척을 듣는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면 잠잠한데/ 문을 닫고 있으면 들리는 바람의 기척// 언젠가 내가 야멸차게 잘라내고 온/ 인연 한 자락/ 지금 어느 문간에서 울고 있다는 듯//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온몸이 검은 눈동자인 심연도/ 외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은 밤// 불을 끄고 그림자를 벗어보지만/ 젖은 마음을 쉬게 할 곳 마땅치 않다// 누구도 밟은 적 없는 흰 어둠만/ 사르륵사르륵 창문으로 들이치는// 성탄 전야
_휘민, '호랑가시나무를 생각하는 밤'

▲'시힘' 동인들은 "한 번씩 모일 때마다 새로 쓴 시를 가져 와 합평을 진행했고, 모두 약속한 것처럼 매번 통음의 밤을 보냈다"고 안도현은 말한다. 위 사진은 2002년 대전 모임, 아래는 지난해 12월 경북 예천 낭독회. [몰개 제공]

상실이 시의 동력으로 작동하기는 김성규도 마찬가지다. 휘민과 같은 2000년대에 등단한 시인 김성규는 어린시절 죽은 형을 생각하며 "어머니 아버지의 가시덤불 같은 마음에 들어가 한번 누워보고" 싶었다고 썼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녹여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이 자신에 대한 원망이든 사랑과 이해이든, 그것이 시의 근본이고 그 근본 속에서 시의 씨앗은 언제나 작은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묻는다.

'시인은 감정 수선사'라고 말하는 이대흠의 신작시도 흥미롭다. 그는 "한 편의 시를 읽고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씻는 것과 같다"면서 "시를 쓰는 일은 그렇게 구겨진 감정을 빨고, 다림질하고, 풀을 먹여서 반듯한 감정으로 되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서툴러서 잘못 수선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선을 다해 나의 감정을 고치고, 다시 만든다"면서 "훗날에는 엉망이 된 타인의 감정도 수선할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때 묻은 감정들은 세탁기에 넣고 구겨진 몇 개의 감정을 다려야겠습니다// 어떤 감정은 냄새가 폴폴 납니다 다시 살려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썩었다면 빨리 버려야겠지요 다른 감정에 곰팡이가 번질까 두렵습니다 문을 열고// 망가진 감정들을 수선하는 밤입니다/ 밤이 좋은 건 별빛을 수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흠, '시인은 감정 수선사'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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