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리얼리즘' 서양화가 이재옥 "다 말할 수 있다면 예술이 아니다"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 2022-10-16 23:46:55

[인터뷰] 흘러내리는 물감의 이미지, '범벅' 시리즈로 소통 나서
특별초대전 '범벅'(Beombuck), 비채아트뮤지엄서 이달 27일까지

서양화가 이재옥의 특별초대전 '범벅(Beombuck)'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25년 차 중견 작가인 이재옥은 최근 '흘러내리는 물감의 이미지'의 '범벅' 시리즈로 주목받고 있다. 다양하고 강렬한 원색으로 인간의 내면과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그를 만나 저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서양화가 이재옥의 'Out of the box' [사진=석성원]

이재옥은 사실 2004년 무렵 붓을 놓고 말았다. 더는 캔버스 위를 유영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가로서의 에너지와 본능이 고갈돼 방황일지 휴식일지 무심한 4년여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2008년, 그는 우연히 버려진 귤껍질을 보고 숨겨진 내면의 소리와 마주했다. 찢기고 헤진 귤껍질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과 같았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화가로서의 본능을 찾은 순간이다. 그 순간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이 작가는 '귤'과 관련한 연작을 시작했다.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 연작'은 이미 잘 알려진 그의 수작들이다. 야수성을 되찾은 그는 다시 붓을 들어 처음 2년여 귤껍질을 그리는 데 신명을 다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귤껍질 작업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미움과 사랑으로 이원화되고 점철된 화두를 붙잡고 매일 몸부림쳤다."

어느 정도 치유의 시간을 보내자 그의 눈은 또 다른 대상인 귤껍질 속 알맹이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귤 알맹이와 함께 다른 일상의 사물도 그려 넣었다. 나중에 보니 사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귤이 아니라 그 옆에 그린 자동차, 의자, 컵 같은 일상의 사물이었다." 내적 갈등을 넘어 사물과의 관계로 작품 세계를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그렇게 시야를 넓혀 갔다.

▲ '범벅' 시리즈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서양화가 이재옥이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에서 UPI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석성원]

"어느 순간에 이르자 물감에 관심이 쏠렸다. 물감 자체가 작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적 치유를 넘어 아예 본질에 집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캔버스 위에 파란 물감을 뒤덮으며 물감 자체를 그렸다."

귤 시리즈는 그가 동질성을 느낀 사물을 통해 방에 갇힌 자신을 마당에 끌어내고 다른 관계와의 확장을 시도한 일련의 작업 활동이라면 '블루시리즈'는 예술과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는 그의 또 다른 여정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본질로 다룬 '블루'라는 색상 자체를 현미경으로 빨아들이는 듯 실체화했다는 것이다. "블루 물감을 캔버스 위에 짜고 칼로 펼쳤다. 더 깊이 본연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순간 나는 그곳에서 작은 공간과 빛을 보았다"고 했다.

이 작가는 최근 들어 물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메인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고체와 액체, 서로 다른 물성에 대한 이해나 이들의 조화에 주목했다는 설명이다. "부드럽게 흐르는 물감이 딱딱한 사물과 만나 일체가 된다. 나는 이런 조화를 통해 관계성을 말하고 싶었다. 이제 나는 색도 블루에 한정하지 않는다. 모든 색을 캔버스에 끌어들이고 있다. 물감의 부드러운 물성과 다양한 색상은 어쩌면 나의 내면의 발현일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이번 특별전의 타이틀은 '범벅'이다. 범벅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컵이나 캔 위에 넘쳐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다양한 원색과 그것을 가두려고 버티는 단단한 컵은 서로 경쟁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대상은 이 작가의 말처럼 순간 일체가 돼 둘인 듯 하나인 듯 묘한 여운을 주고 있다.

▲ 서양화가 이재옥는 자신의 화풍을 '소프트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했다. [비채아트뮤지엄 제공]

이 작가는 "나는 극사실주의나 전통적인 기술을 선호하지 않는다. 나는 작품 속 대상의 평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에게 사실적 표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 했다. 하지만 벽에 걸린 그의 작품들 속 등장하는 대상들은 그림자도 없지만, 오히려 마술처럼 입체감을 주는 듯하다. 특히 여러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적 느낌을 거부하긴 힘들다.
 
이 작가는 이런 자신의 화풍을 "소프트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이 작가는 이런 작업을 위해 머그컵에 유화와 아크릴 물감을 붓고 흘러내리는 것을 관찰하기도 한다. 섞이고 흘러내리는 범벅의 순간을 카메라 앵글처럼 포착해 자신의 뇌리에 심는다. 이런 순간은 나중에 그의 붓을 통해 캔버스에서 실체로 발현된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소프트 리얼리즘이란 것이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순간을 독수리처럼 낚아채는 그만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화려한 원색의 나열로 보이는 이재옥 작가의 여러 연작은 접근 방식이나 창조의 단초가 서로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의 연작들은 왠지 긴 나뭇가지에 꽂힌 곶감과도 같았다.

이 작가는 앞으로 큰 화폭에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 큰 캔버스에 다양한 실험을 하고 싶다. 그림 그리기는 어린 시절부터 해온 놀이이자 습관이다. 친구인 물감도 더 넓은 곳에서 놀게 하고 싶다"며 웃었다.

▲ 전시회 '범벅'에 출품된 서양화가 이재옥의 캔 시리즈 [사진=석성원]

말미에 이재옥 작가는 "다 말할 수 있다면 예술이 아니다. 나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관객의 몫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차피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게 예술이니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라는 얘기다.

이재옥 작가는 충남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수학했다. 다음달 3~6일에는 '글로벌 아트 페어 싱가포르 2022'에 참가할 예정이다.

이재옥 작가의 특별초대전 '범벅'(Beombuck)은 현재 서울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관장 전수미) 1·3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이달 2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에선 그의 대표작인 '레인보우', '하트', '스타', '아웃 오브 박스'(Out of the box) 등 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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