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는 왜 물웅덩이 진흙에 묻혀 있었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1-30 17:16:45
'백제 문화 정수' 걸작이자 비밀 품은 신비로운 유물
1993년 주차장 조성 공사 앞두고 극적으로 발굴돼
'성왕 추모 의식 위해 특별 제작했을 것' 견해 우세
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달 23일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전용 전시관인 백제대향로관(지상 3층 규모)을 개관했다. 국립박물관에 단 한 점의 국보만을 위한 전시관이 들어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를 계기로 부여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부여박물관 관계자는 29일 KPI뉴스와 한 통화에서 "월간 집계 전이어서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체감상 전용 전시관 개관 전보다 관람객이 2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문화의 정수', '백제 금속 공예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빼어난 국가유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풀리지 않은 여러 비밀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유물이기도 하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주요 수수께끼와 쟁점 등을 문답 형식으로 살펴보자.
ㅡ언제, 왜 만든 것인가.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성이 있던 곳이다. 부여 능산리에 백제 왕릉급 무덤이 여러 기(基) 있다. 1993년 12월 그 무덤들 근처에서 주차장 조성 공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극적으로 발굴됐다.
제작 연대 등을 명시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다. 학계에서는 백제 제26대(재위 523~554년) 군주 성왕을 추모하는 의식을 위해 왕실에서 특별 제작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ㅡ성왕과 연관돼 있을 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백제금동대향로 발굴을 계기로 그 일대에 대한 추가 조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그곳이 백제 시대 절터였음이 확인됐다. 1995년 절의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 사리감(사리를 보관한 용기)이 발굴됐는데, 거기에 중요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창왕 13년 즉 567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문구였다. 창왕은 성왕의 아들이자 제27대(재위 554~598년) 군주인 위덕왕을 말한다. 공주는 위덕왕의 누이이자 성왕의 딸로 여겨진다.
성왕은 554년 신라를 공격하던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하다가 매복한 신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 아들이 당시 태자이던 위덕왕이다. 즉 위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누이와 함께 이 절을 세웠을 것이고, 백제금동대향로는 거기서 성왕의 제사 때 향을 피우고 넋을 기리는 등의 의식용으로 쓰이지 않았겠느냐는 추정이다."
ㅡ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물웅덩이 진흙 속에 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 왜 그런 상태로 있었던 것인가.
"발견된 곳은 절의 공예품 등을 만드는 공방에서 물을 담아둔 수조가 있던 자리임이 확인됐다. 이에 대해 백제금동대향로가 수리를 위해 공방에 맡겨졌다가 뭔가 사정이 생겨 묻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백제 멸망과 관련돼 있을 수 있다고 보는 연구자가 더 많다.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고, 663년 부흥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멸망한다. 사비성이 함락되는 긴박한 순간에 왕실의 보물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적에게 약탈되지 않도록 누군가 숨긴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ㅡ제작 후 적어도 1300년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 당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이유가 뭔가.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공기 접촉이 제한되면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묻히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묻힌 덕분에 심각한 변형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역설이다."
ㅡ백제가 아니라 중국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 문제를 짚기 위해 박산(博山)향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을 박산이라 한다. 삼신산은 중국 동쪽 바다에 있다는 상상의 산인데, 신선들의 이상 세계로 여겨진다. 박산향로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다양한 동식물 등이 표현되는 이유다.
중국에서 박산향로는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 말부터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8년, 기원후 25~220년) 때까지 유행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박산향로와 형태가 유사하다. 중국과 일본 연구자 중에는 그런 점 등에 초점을 맞춰 백제금동대향로가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 학계에서는 다르게 본다. 산 모양으로 향로를 표현한 것은 박산향로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제인의 창의력과 독창적인 기술력이 없었다면 백제금동대향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6~7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향로 중에는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정밀하게 제작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크기도 전혀 다르다(백제금동대향로가 일반적인 중국 향로의 약 3배). 백제에서 제작된 것이 명확한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에 백제금동대향로와 유사한 요소가 있다는 점도 이 향로가 수입품일 수 없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ㅡ백제금동대향로 꼭대기에 있는 새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봉황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상서롭고 신령한 새로 여겨진 천계(天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있다. 불교에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존재 중 하나인 가루라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는 봉황을 표상한 것이라고 본다. 소장처인 부여박물관, 그리고 국가유산청에서 운영하는 국가유산포털의 유물 설명에는 봉황으로 명시돼 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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