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묻힌 곳에 아베 신조 조상 기념비가 있었던 사연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2-03 16:43:00
보훈부, 서울 효창공원의 국립공원화 추진 발표
출발점은 1786년 효창묘…1870년 효창원 승격
일제, 침략 기념 공간으로 만들고 공원으로 전환
광복 후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거듭나…김구 앞장
독립운동가 추모와 무관한 시설 계속 들어서 논란 ▲ 3·1절을 사흘 앞둔 지난해 2월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조성된 태극기 거리. [뉴시스]
문효세자 사망 넉 달 후 정조를 비통하게 만든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번엔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 궁녀의 사랑을 다뤄 2021~2022년 방영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된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여주인공 궁녀가 바로 의빈 성씨다.
정조는 의빈 묘를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에 마련했다. 그 후 정조의 아들인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 딸인 영온옹주의 묘도 그 주변에 조성됐다. 1870년(고종 7년) 효창묘는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일대에 왕가의 묘가 여럿 조성되자 왕실 묘역으로서 격을 높인 조치였다.
1876년 개항 후 조선이 열강의 표적으로 전락하면서 효창원에도 수난이 닥쳤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선 곳이 효창원 구역에 해당하는 만리창 즉 지금의 용산구 효창동 일대다. 이로 인해 효창원 일대는 일본군에 의해 적잖게 훼손됐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효창원을 멋대로 변형하기 시작하는데, 두 가지 방향성이 눈에 띈다. 하나는 경성 즉 지금의 서울 지역에 늘어난 일본인 거주자들의 휴양 및 놀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921년 서울 지역 최초의 골프장을 뜬금없이 효창원에 개장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1940년에는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바꾼다고 고시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자행한 침략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시마 혼성 여단이 주둔했던 사실을 기념하는 비석을 1929년에 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시마 혼성 여단은 1894년 경복궁을 불법 점령한 부대다. 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였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재임 2006~2007, 2012~2020)가 오시마 요시마사의 현손(玄孫)이다(아베 신조의 할머니가 오시마 요시마사의 손녀).
1940년대 들어 효창공원에 이른바 충령탑 건립이 추진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고 넋을 기리겠다는 것이었다. 1944년 일제는 이 탑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효창공원의 조선 왕가 묘들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게 했다.
1945년 광복을 계기로 효창공원은 일제의 침략을 기념하는 곳에서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거듭났다. 이에 앞장선 사람은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김구였다.
1946년 김구는 일제 강점기에 순국한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를 봉환해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가묘도 마련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의 묘소도 1948년 효창공원에 들어섰다.
얼마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효창공원에도 드리웠다. 이는 김구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분단에 반대한 김구는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그리고 효창공원에 묻혔다. 편안하게 장사 지냈다는 뜻의 '안장(安葬)'이라는 말을 쓰기 어려운 억울한 죽음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암살 진상 규명은 고사하고 추모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형사들이 김구 묘소 길목에서 참배객 신원을 조사하며 감시했다. 부친 묘소를 찾은 김구 아들 김신조차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암살범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 쪽 인사들의 비호를 받으며 좋은 시절을 보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감시 받을 걱정 없이 김구를 추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추모와는 거리가 먼 시설과 기념비가 효창공원 일대에 계속 들어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이승만 정권 때 공사가 시작돼 1960년 10월 개장한 효창운동장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정권 때 건립된 북한반공투사위령탑(1969년), 고 육영수 여사 경로송덕비(1975년) 등도 그런 사례로 꼽힌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국립공원 전환 추진 방침이 독립운동가 추모 공간으로서 효창공원의 역사성을 충분히 살리는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출발점은 1786년 효창묘…1870년 효창원 승격
일제, 침략 기념 공간으로 만들고 공원으로 전환
광복 후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거듭나…김구 앞장
독립운동가 추모와 무관한 시설 계속 들어서 논란
국가보훈부가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의 국립효창독립공원 전환을 추진한다고 1일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국무회의에서 효창공원의 국립공원화 검토를 주문한 데 따른 후속 조치로 풀이된다.
1989년 사적으로 지정된 효창공원의 관리 주체는 서울 용산구다. 그런데 공원 내 독립운동가 묘소 관리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그간 이어졌다. 지난해에는 안중근 의사 가묘 봉분이 짐승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국립공원화 추진을 두고 '늦었지만 바람직한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효창공원의 역사는 240년 전 한 왕자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1786년(정조 10년) 조선 제22대 군주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을 앓다가 숨졌다. 홍역이 전국적으로 창궐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해였다. 세자로 책봉되긴 했지만 생후 만 4년도 안 된 어린아이였다. 정조는 너무 일찍 떠난 아들을 지금의 효창공원 자리에 묻고 효창묘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효세자 사망 넉 달 후 정조를 비통하게 만든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번엔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 궁녀의 사랑을 다뤄 2021~2022년 방영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된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여주인공 궁녀가 바로 의빈 성씨다.
정조는 의빈 묘를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에 마련했다. 그 후 정조의 아들인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 딸인 영온옹주의 묘도 그 주변에 조성됐다. 1870년(고종 7년) 효창묘는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일대에 왕가의 묘가 여럿 조성되자 왕실 묘역으로서 격을 높인 조치였다.
1876년 개항 후 조선이 열강의 표적으로 전락하면서 효창원에도 수난이 닥쳤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선 곳이 효창원 구역에 해당하는 만리창 즉 지금의 용산구 효창동 일대다. 이로 인해 효창원 일대는 일본군에 의해 적잖게 훼손됐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효창원을 멋대로 변형하기 시작하는데, 두 가지 방향성이 눈에 띈다. 하나는 경성 즉 지금의 서울 지역에 늘어난 일본인 거주자들의 휴양 및 놀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921년 서울 지역 최초의 골프장을 뜬금없이 효창원에 개장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1940년에는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바꾼다고 고시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자행한 침략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시마 혼성 여단이 주둔했던 사실을 기념하는 비석을 1929년에 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시마 혼성 여단은 1894년 경복궁을 불법 점령한 부대다. 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였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재임 2006~2007, 2012~2020)가 오시마 요시마사의 현손(玄孫)이다(아베 신조의 할머니가 오시마 요시마사의 손녀).
1940년대 들어 효창공원에 이른바 충령탑 건립이 추진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고 넋을 기리겠다는 것이었다. 1944년 일제는 이 탑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효창공원의 조선 왕가 묘들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게 했다.
1945년 광복을 계기로 효창공원은 일제의 침략을 기념하는 곳에서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거듭났다. 이에 앞장선 사람은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김구였다.
1946년 김구는 일제 강점기에 순국한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를 봉환해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가묘도 마련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의 묘소도 1948년 효창공원에 들어섰다.
얼마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효창공원에도 드리웠다. 이는 김구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분단에 반대한 김구는 1949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그리고 효창공원에 묻혔다. 편안하게 장사 지냈다는 뜻의 '안장(安葬)'이라는 말을 쓰기 어려운 억울한 죽음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암살 진상 규명은 고사하고 추모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형사들이 김구 묘소 길목에서 참배객 신원을 조사하며 감시했다. 부친 묘소를 찾은 김구 아들 김신조차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암살범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 쪽 인사들의 비호를 받으며 좋은 시절을 보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감시 받을 걱정 없이 김구를 추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추모와는 거리가 먼 시설과 기념비가 효창공원 일대에 계속 들어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이승만 정권 때 공사가 시작돼 1960년 10월 개장한 효창운동장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정권 때 건립된 북한반공투사위령탑(1969년), 고 육영수 여사 경로송덕비(1975년) 등도 그런 사례로 꼽힌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국립공원 전환 추진 방침이 독립운동가 추모 공간으로서 효창공원의 역사성을 충분히 살리는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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