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권민진의 변신…"의도치 않은 추상화의 길"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 2024-07-31 15:12:22

산책길서 마주친 꽃 생명력의 본질 화폭에
한국화가에서 의도치 않은 추상화가 변신
"생명력 본질 포획해 관객과 나누고파"
8월8일~11일 SETEC 뱅크아트페어 출품

"그림 전체가 점점 단출해져요. 색상 수도 현저히 줄었죠." 화가 권민진은 최근 몇 년간 이런 증상을 겪어왔다. "구체적 모습이 상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다. 중견작가 반열에 들어서는 구상 화가들이 더러 겪는 증상이다. 권 작가는 7년여 이런 증상을 앓다 결국 "의도치 않은" 추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 화가 권민진 [작가 제공]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화는 묘하다. 필요 이상으로 숭배하거나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나 오만 때문이다. 또 오랫동안 추상이 한국 미술계에서 속된 말로 '장사 되는' 한 분파로 자리 잡았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궤도를 수정', 추상화가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기초 없이 탑을 쌓는 꼴이다. 아류 작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 권민진 , 장지에 분채, 호분, 금분, 색연필, 116 x 91 cm, 2022 [비채아트뮤지엄]

 

수준 높은 추상화가는 술이 익듯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만들어진다. 그래서 '추상 기법'은 무병을 앓듯 화폭과 씨름하며 '나도 모르게 얻어지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 그러니 진정한 추상 화풍에 하룻강아지는 있을 수 없다.

간략하게 한국 추상미술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 몇몇 일본 유학파들에 의해 시작한 우리 추상미술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와 기성 화단에 저항, 집단으로 펼치던 앵포르멜(Informel) 미술운동이 밑 거름이 됐다.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1970년대 중반쯤 시작한 단색조 회화에 의해 재차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후 1990년대에 닥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기류로 현재까지 열기는 다소 식었지만 여전히 추상화풍은 한국 미술계의 주류 중 하나로 남아있다.

▲ 권민진 작 좁은길, 100*69, 장지에 분채, 호분, 2008 [비채아트뮤지엄]

 

권 작가는 애초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는 오랫동안 꽃을 대상으로 구상화를 그렸다. 자주 지나던 산책로에서 마주친 꽃, 특히 봄에 만개한 꽃의 생명력에 심취했다. "에너지파처럼 심장을 강타한 이런 꽃들을 습관처럼 그렸죠. 생각해 보면 생명 본질에 다가서려는 나름의 몸부림이었죠."

2008년 그는 만개한 여러 꽃을 바라보는 등 돌린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 꽃이 주연인지 소녀가 주연인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 <좁은길, 100*69>은 당시 그의 구상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하지만 이 그림은 표면적 주체와 대상이 관계를 넘어서는 상호작용, 즉 또 다른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또 그사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좁은 길은 여러 철학적 사고를 이끄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미 이때부터 단순한 구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추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권민진, 붉은색 원형의 군집1, 80x80cm, 장지에 동양화물감, 2016(좌) 초록색 원형의 군집1, 80x80cm, 장지에 동양화물감, 2016 [비채아트뮤지엄]

 

2016년 돌연 그의 그림은 전혀 다른 양태를 보인다. <붉은색 원형의 군집1, 80x80cm, 장지에 동양화물감> 같은 여러 작품에 그는 크고 작은 여러 원형 패턴을 서로 교접하게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는 꽃에서 영감을 얻은 생명의 화두를 당시 또 다른 대상이 '빛'으로 관념을 옮겨가고 있었다. 원형 문양 패턴은 결국 생명, 즉 빛의 추상 현신으로 봐야 한다. 여기에 그는 원들의 교집합을 통해 생명의 관계성이나 상호작용을 표현했다.

▲ 권민진 , 3합장지에 분채, 호분, 포스터 칼라, 자개, 100 x 80 cm, 2021 [비채아트뮤지엄]

 

2021년에 이르러선 수직과 수평 등 기하학적 형태를 채우며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이런 형태도 전작처럼 어떤 근본이 추상으로 현신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방식은 낯설지 않다. 추상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나 1990년대 이전 한국 추상의 오리진 그룹으로 불리는 대가들이 대상의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거나 단순화해 기하학 문양으로 소구한 기풍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의 수직 수평선이 품는 철학적 의미나 지향점은 자기만의 방식이다. 그의 이런 화풍은 아마도 지난날 칸딘스키 같은 대가들의 경험한 '삼매(三昧, 불교 수행법으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의 일부를 그도 체험했을 거란 짐작을 하게 한다.

"수직은 생명이고 수평은 죽음과도 같아요. 상반되지만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무언가로 엮인듯해요. 죽음도 생명이고 생명도 죽음이니 이들의 관계는 순환이며 상호작용이죠." 그가 단순히 과거의 추상주의 기법을 채용한 것이 아니란 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 권민진 , 장지에 분채, 호분, 비즈, 116 x 91 cm, 2019-2020 [비채아트뮤지엄]

 

사실 최근 현대미술의 경향은 작가의 기예 능력보다는 작품이 품은 철학적 의미, 혹은 시대정신이 무어냐에 따라 작품성이 갈리는 경향이 있다. 실사 표현의 권력은 이미 사진기로 옮아간 지 오래다. 작가가 집어 든 화두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 작품성이나 작가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주요인이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 장지에 분채, 호분, 포스터 칼라, 53*45cm, 2024 [비채아트뮤지엄]

 

인터뷰 내내 그는 자기의 표현 양태가 어떻든 가장 중요한 끈은 생명에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가 생명의 신비나 경외를 추구하는 방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적 신념이나 목적을 작품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는 "어떤 종교든 어떤 사상이든 결국 생명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본능적으로 한 곳을 향하는 듯하다"며 "방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고 했다.

"다시 꽃을 그리려 해요. 물론 구상은 아니겠죠. 모티브만 꽃이죠. 전작들처럼 꽃을 패턴화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꽃에 더 큰 역할을 맡기고 싶어요. 너무 세밀한 계획에 치중하지 않으려 해요. 틀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죠." 

 

▲ 권민진 , 장지에 분채, 호분, 금분, 색연필, 116 x 91 cm, 2022 [세이아트(SayArt)]

  

그의 작품은 서양화풍의 추상화다. 하지만 실상 재료엔 특이점이 있다. 작품에 묘한 향이 난다.. 전공을 살린 영향이다. 그는 전통 한지 세 겹을 덧붙인 '삼합장지'를 캔버스처럼 사용한다. 한지는 캔버스와 달리 물감을 품는 재주가 있어 묘한 색상을 발현한다. 호분과 분채도 사용한다. 호분은 대합(大蛤), 굴 등의 조개껍질을 빻아 만든 것이고 분채는 흙을 물에서 정제해 만든 것이다. 둘 다 채색에 사용하는 전통 물감이다. 더러 자개나 금분, 은분 등도 맘이 통하면 소환한다. 한국식 추상화인 셈이다.

 

▲ 권민진, , 장지에 분채, 호분, 212 x 106cm, 2020 [비채아트뮤지엄]

 

그의 최근작들은 마치 물질의 양자적 시각화로 보인다. 원자든 광자든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존재론적 입장에서 시각화한 듯하다. "양자역학 같은 어려운 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본질과 생명이란 관점에서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듯해요. 또 점점 대상의 모습이나 색이 점점 사라지는 듯해요. 외관이나 색은 결국 생명의 본질이 아닌 셈이죠."

그는 생생한 생명 상태를 포획해 관객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얘기는 지금 순간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에 가장 잘 다가선 찰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동시에 실존할 수도 있고, 현재 자체가 과거와 미래의 본질이라는, 그래서 바로 지금이 생명 본질이라는 얘기다.

 

▲ 권민진 , 장지에 분채, 호분, 금분, 색연필, 116 x 91 cm, 2022 [비채아트뮤지엄]

 

누구나 주어진 삶이 있다. 어린 시절 객기로 시작한 작가의 길은 오래 갈 수 없다. 오랜 작가의 삶을 잇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예술가의 길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재미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재주를 가진 듯했다. 

권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한국화로 석·박사과정을, 백석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학(이론)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수십 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출품했으며 미술세계 뉴프론티어전 동양화 부문 특선(2001), 한국기독교미술대전 특선(2022), 이화여대 양자역학 공모전 예선 통과- 도록 수록(2021)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쌓았다.

권 작가는 8월 8일~11일까지 나흘간 서울 대치동 세텍(SETEC)에서 열리는 뱅크아트페어(Bank Art Fair)에 출품한다. 올해 뱅크아트페어는 국내외 129개 갤러리가 약 1200여명의 작가 작품 1만5000여 점을 무대에 올린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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