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사랑은 흑고양이를 닮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2-28 17:27:42
강박에서 벗어나 쓰다보니 '튀어나온' 시편들
가벼운 외출하듯 흥미롭게 시도한 '젊은' 시집
"흑고양인 줄 알았는데 들고양이 같은 헛사랑"
사랑은 위험한 줄 위에서만 싱싱하게 우는/ 흑고양이를 닮았다 / 순간의 털끝에서 반짝거리고/ 야행과 질투로 발톱을 세운다// …// 검은 털 속에 요염한 눈알/ 끌어안으면 녹아버릴 것 같은/ 꼬리도 그림자도 없이/ 슬며시 사라지는 요물/ 지금 내가 만든 부엌에서 화장실에서/ 심지어 침실에서/ 흑고양이 희미하게 야옹거리고 있다 _ '사랑은 흑고양이다' 부분
요염한 흑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쫓아가 보면 들고양이로 변하곤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문정희 시인은 말했다. 지난 시집에서는 사랑은 '망한 노래'라더니, 3년 만에 내놓은 새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아침달)에서는 '헛사랑'이다. 그는 "사랑 앞에 '헛'이라는 접두어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할 짓이 아니긴 해/ '핫'이라면 몰라 서양말이긴 하지만// 사랑은 바람도시에 절뚝이는 가건물/ 시멘트로 지은 굴뚝"이라면서 "나는 늘 불리해/ 사랑에 빠지면 생을 걸거든"이라고 되뇐다.
'아침달' 시선은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만의 목소리로 시를 써온 시인들의 작품을 발굴해 출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선에 원로급 시인의 시집이 끼어든 것은 그가 "즐거운 외출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례적이다. 1부 '골목 빈터에 첫 물방울처럼'에는 사랑의 절박함과 그 배면의 헛것을 담은 시들, 2부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에는 시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깃든 시편, 3부 '내 야생의 사랑 시'에는 세계 각처를 돌며 시를 낭송하고 문인들과 어울렸던 과정에서 생산한 시들을 포함해 모두 44편을 수록했다.
-'헛사랑'에 방점을 찍은 배경은?
"구체적 대상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나 자신도 헛것 같다는 느낌이다. 사랑이라고 얘기했던 것들이 다 헛것 같은 느낌에 대한 망연한 자각? 그런데 결국은 이 헛사랑이 핫사랑이지 않은가. 사랑의 정체라는 것이 지극히 미세한 향기이고, 별거 아닌데 이런 것에 홀리고, 이 홀리는 것이 또 아름답고… 그런 자각들이 있었다. 전에는 '망할 사랑 노래' 정도로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나이와 경험의 힘이 더 작용한 것 같다. 절망이 더 강해졌다."
절망이 깊어도 여전히 음식처럼 사랑을 갈구하는데 사랑과 음식은 유효기간이 짧다. 그는 "숨차게 흡입하는 입술을 가진/ 배고픈 식객들이/ 길게 줄을 선 밥집 앞에서// 사랑과 음식/ 그 짧은 유효기간을 생각한다"면서 "때로 신과 대결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랑과 음식이지만/ 아니 음식과 사랑이지만// 요즘엔 대결할 신도 없어/ 갈증의 숟가락 하나씩 들고 밀려다닌다"('사랑과 음식')고 썼다. '실연'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타이레놀을 먹으라고 했다면서'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것이냐'고 묻는다.
-오랫동안 천착한, 쉬 식지 않는 사랑이다. 에너지의 근원은?
"사실 나는 한번도 제대로 사랑을 한 것 같지 않다. 한번이라도 사랑에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너무 부족하다. 부족한 걸 넘어서서 갈증 투성이다. 나혜석이 폐병에 걸려 죽어가는 첫사랑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손톱 발톱을 자르고 목욕을 시키고 머리맡에 금붕어 어항과 꽃을 놓아두고 가는 대목에서 현란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진실이라고 믿게만 해줘도 좋겠다. 흑고양이처럼 신비스럽게 야옹야옹 하면서 어슬렁거리다가 사라져버리는 들고양이 같다."
-이번 시집에도 시를 쓰는 태도와 '범람하는 시들'에 대한 비판이 빠지지 않는다.
"너무 불안하고 두려운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나는 계몽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두렵고 험난하고 불안한 시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내 눈에는 언어의 타락이다. 너무 거칠어지고 타락한 시궁창 언어가 난무한다. 특히 정치 언어는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시에서 플라스틱 쪼가리를 먹고 죽어가는 바닷새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언어의 타락과 부패, 언어의 죽음이다. 이런 시대에 시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왜 없겠는가. 문학이 미약해지고 그 힘도 의심되는 이런 시대에 언어의 타락과 부패를 보면서 그래도 아름다운 얘기를 해야 된다는, 젊음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 작은 시집을 낸 거다."
-요즘 '대형마트에 납품되는 시들'은 언어에 대한 엄정한 태도가 사라진 경우인가?
"그렇다. 소비되고 있다. 시를 왜 쓰는가에 대한 필연성보다는 소비와 환호성에 대한 아첨의 시집이 있는가 하면, 왜 이 시를 써서 내놓아야 하는지 필연성이 없는 웅얼거림이나 자기 폐쇄회로에 갇힌 얘기를 그럴 듯한 서정적인 문장으로 바꿔서 내놓는 범람이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소모이고 낭비이다."
대낮에 샤워를 하다가 전화를 받는다/ "와, 다 벗었구나. 눈부시다"/ 천 리를 꿰뚫어 보듯이 그는 말했다/ 지금 내 시집을 손에 들고 있다고 한다// (…)/나는 벗었다? 나는 벗지 못했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 끈끈한 감상/ 흐르는 물 위로 피어오르는 추상어와/ 알맹이 없는 상상력 다 버리고/ 털 없는 철새?/ 시간의 미추를 벗어버린 알몸에/ 좍좍 물을 끼얹는다_ '나는 벗었다' 부분
-시인에게 요구되는 절실한 태도는 '벗는' 일인가.
"존재 자체를 직시하고 그 직시한 자기 존재를 가장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도 벗지 못하고 누가 원하는 옷을 입고 있다거나, 그것에 합당하는 언어를 적당히 발라서 잠깐 주목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큰 소모이고 짧은 인생의 낭비인가 하는 생각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늘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내 길을 가고 있어/ 그게 내 권력이야'('몸에 털이 난 아침')에서 황혼에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힘이 느껴진다.
"과거의 가치가 너무 쉽게 사라지는 것 같다. 새로운 것, 젊은 것에만 너무 눈빛을 반짝거리는 세상에 대해서 그냥 내 길을 가고 있어, 그게 내 권력이야, 이런 얘기를 쓴 것이다. 젊음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일정 기간 봉인된 어떤 시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정신 속에 늘 호기심과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는 기간이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젊은 시인이라는 생각이다."
흰 국화 한 송이 들고/ 사진 속 너를 본다/ 너와 나의/ 거리距離/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곳으로 가는 동안만이/ 우리들의 길 또는 생애다// 정해진 길 없는 길/ 건너고 건너도/ 결코 다가설 수 없는 사랑도/ 전쟁과 장사일 뿐/ 원래 없는 것이니 모래 더미의 싸움일 뿐// 안녕/ 부디 잘 가요// 가장 흔한 말이/ 왜 가장 슬픈 말인지/ 흰 국화 한 송이 들고 사진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 자리 _ '트랜스퍼' 전문
꿋꿋하고 거침없는 시인의 행보는 변함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도 드러낸다.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곳으로 가는 동안만이 우리들의 생애'라는 장례식장의 상념은 쓸쓸하다. '다시 튀어 오르는 나를 보려고' 떠난 여행에서 만난 고야의 그림 '가라앉는 개' 에서는 존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빨리 돌아가서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
문정희 시인은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와 기법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인 변화를 도모할' 시집을 하반기에 따로 펴낼 예정이다. 그는 "이번 시집에는 주옥 같은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튀어나오는' 것들을 모았는데 뜻밖에도 잘 읽히고 재미 있어서 잘했구나 싶다"면서 "알알이 나의 한순간이었고, 생명의 순간이었고, 반짝반짝한 사랑의 기쁨이었고 슬픔이었던 그런 것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언어의 정원' 돌에 새긴 시편.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하늘 아래 가득한 질문 하나 _ '산티아고 순례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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