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거 왜 이래?"
윤흥식
jardin@kpinews.kr | 2019-03-18 11:15:24
돌아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
서울 연희동에 거주하는 88세 노인이 지방 나들이를 했다. 그로서는 여러 면에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주머니에는 달랑 29만 원밖에 없고, 골프장만 벗어나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무슨 흥이 나서 휘파람 불며 길을 나서겠는가.
더구나 그가 방문해야 할 도시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원죄'가 서려 있는 땅이었다. 노인은 죽은 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그 도시에서 재판을 받게 돼 있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더이상 버티다간 구인장이 날아올 판이었다.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노인은 구시렁대며 집을 나섰다.
대외적으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것으로 돼 있는, 구순을 코 앞에 둔 노인은 안 그래도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고는 도무지 모르는 젊은것들이 입만 열면 자신을 '도살자'니, 뭐니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부터가 마땅치 않았다.
"이 나라를 북한의 적화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오늘날 이나마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게 누군데..." 생각해 보면 야속한 노릇이었다.
세상 인심 역시 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시절, 그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던 친구들은 어느덧 주변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비밀을 아는 이는 세상에 단 한 명, 마누라밖에 없었다. 숱한 '오해'를 감수해가며 '보도지침'까지 만들어 기자들을 계도했건만, 지나고 보니 다 헛된 일이었다.
노인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법원 정문에 들어섰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도열해 선 기자들이었다.
"나한테 제대로 당해보지도 않은 것들이..." 노인의 입에서 저절로 불만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척 봐도 어르신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젊은 기자 몇 명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시민들께 사과할 생각 없습니까?" 하루 이틀 들어온 질문이 아니었다. 저 무식한 애들을 가르치려 들면 입만 아플 게 뻔했다. 못 들은 체 넘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쯤은 나이가 가르쳐줬다.
그런데 다음 질문이 다시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발포 명령 부인하십니까?" 오늘 이 도시에 그토록 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질문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노인은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거, 왜 이래?"
2019년 3월 11일 광주지법 정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역사는 이날을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 없이 용서받은 자가 민주주의를 모욕한 날"로 기록할 것이었다. 그날은 아울러 가엾은 연희동 노인이 역사와 민족 앞에 참회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날로 기억될 것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대한민국 남성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2만 5284명이다.
이틀 뒤인 2019년 3월 13일 서울 논현동에 사는 78세 노인이 서울고법에 출두했다. 총 16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원, 추징금 82억 원이 선고된 노인은 1000만 원의 보석보증보험증권을 내고 풀려난 상태였다. 40분간 속행공판을 받고 나온 노인은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알 듯 말 듯 미소가 흘렀다.
사적 이익추구에 눈이 어두워 한 사회의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능멸한 당사자가 충분히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았을 때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다시 욕보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웃음이었다.
KPI뉴스 / 윤흥식 사회에디터 jardin@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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