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균의 금융경제 읽기] 美연준의 AI낙관론과 중앙은행의 함정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hongkyooncho@korea.ac.kr | 2026-01-19 11:10:54
중앙은행·재정당국長, 기술·제도 균형 이루는 신뢰 설계자여야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차기 의장 주요 후보로 조명되어온 인물들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생산성 향상이 미국 경제를 장기간의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국면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술과 경제 전망을 넘어 향후 미국의 정책금리 경로와 통화정책 프레임워크, 더 나아가 글로벌 통화금융 질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도로 작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사의 핵심은 무엇인가. AI로 생산성이 구조적으로 높아지면 물가 압력은 완화되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AI의 생산성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후보가 차기 의장에 취임하는 시나리오를 말해준다. 이 경우 연준의 정책 구도는 성장 잠재력 확대, 중립금리 하향 조정, 정책금리 인하로 이동한다. 환율 경로는 금리 인하 기대 반영으로 달러화 약세 압력을 받게 된다.
이 논의는 미국 내부의 정책 선택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의 AI 생산성 낙관 서사는 글로벌 최핵심 기축 통화국의 정책 프레임워크를 통해 각국의 정책 판단에 외생적 제약이자 흡인력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통화·재정정책 또한 이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이 AI를 기반으로 장기간의 비인플레이션 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가설이 정책 전제로 채택된다면 한국은 어떤 선택지에 직면하게 될까. 글로벌 금리 환경이 완화적으로 가는 경우 일응 한국의 통화정책 운신 폭은 단기적으로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정책 판단의 난도를 급격히 높일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의 AI 생산성 서사를 전제로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지나치게 상향 조정하거나 재정 여력을 낙관적으로 평가할 위험성 등은 없는 것인가.
먼저 재정정책 면에서 AI를 성장 담론으로만 바라보려는 접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AI는 곧바로 세수를 확대해 주는 마법의 기술이 아니다. AI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강조하는 데에는 다들 익숙해져 있지만 AI가 곧바로 재정 여력을 확대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성급하다. 오히려 AI는 조세 기반의 구조적 변화를 동반한다. 자동화와 플랫폼화는 노동 소득의 상대적 비중을 약화시키고 자본 소득과 초과이윤의 집중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은 기존 부가가치세, 소득세 체계를 흔들 수 있다. 아울러 재교육, 전환 비용, 사회 안전망 강화 등 AI 전환 관련 재정 지출 수요는 기조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AI는 재정 여력을 자동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 구조 전환, 즉 조세 기반의 변화와 재정 지출 구조의 질적 전환을 요구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낙관적으로만 보려는 AI 생산성 서사가 자칫 재정 규율에 대한 경계심 약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중요한 것은 금리의 절대적 수준이라기보다는 정책 프레임워크다. AI 생산성 향상이 가져오는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에 대한 과도한 낙관이 완화적인 통화정책으로 이어질 경우 자산 가격 상승과 금융 불균형을 누적시키고 결국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안정화에 개입해야 하는 상황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는 통화정책이 금융시장에 종속되는 금융지배(financial dominance)의 위험을 키운다. 낮은 인플레이션과 견실한 성장을 이룬 대안정기(great moderation)와 같은 중앙은행 황금시대에 구가했던 통화지배(monetary dominance)의 복원이 아니라 통화정책이 금융시장에 포획되는 형국이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AI 생산성 낙관론이 중앙은행의 정책 자율성을 넓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약하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1990년대 미국의 황금기, 이른바 그린스펀 시대는 그대로 반복될 수 있는 정책 매뉴얼이 아니다. 그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지정학적 환경, 노동시장 구조, 세계화 수준, 국제 무역 규범 등의 정치경제적 여건은 지금과 질적으로 다르다. 기술에 대한 낙관에 기반한 정책 판단이 통화지배의 약화, 금융지배의 강화, 재정 규율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AI 서사로 미국이 다시 그린스펀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지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작동하는 정책 체계를 준비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낙관은 왜 반복적으로 정책 오판을 유발하는가. 문명사적 대전환기마다 새로운 기술은 늘 정책적 구원의 서사로 등장해 왔다.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인터넷은 모두 생산성 가속과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을 약속하는 담론으로 쓰였다. AI 역시 이 계보 위에 놓여 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이 정책결정자가 직면한 불확실성을 줄여보려는 서사적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분배 갈등은 추후 성장이 해결할 문제로 미뤄지고 재정 지속성 개혁은 미래 세수 확대 기대로 유보된다. 기술에 대한 낙관이 어떤 가능성을 설명하기 이전에 현실의 제약을 완화하려는 담론으로 소비될 때 정책 오판의 출발점이 된다. AI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정책 오판을 경계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정책 거버넌스의 주요 과제는 기술에 대한 낙관을 넘어선 통합적, 포괄적 판단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을 이해하는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술을 정책 프레임워크 안에서 어떻게 다루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제도적 통찰이다. 그래서 한국 정책당국에 주는 시사점은 다시 인사 혁신과 거버넌스로 수렴된다. 특히 우리 시대의 중앙은행과 재정당국 수장은 기술과 제도를 읽고 판단하는 균형 있고 포괄적인 통찰력을 지니는 인물이어야 하겠다.
100년 전 케인스가 말했듯이 정책결정자는 추상과 구체를 동시에 살펴야 하며 예술가처럼 초연하되 정치인처럼 현실과 가까워야 한다. 불확실성이 정책 환경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요구되는 정책결정자는 기술에 대한 낙관에만 기댄 예언자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제도와의 균형을 이루는 신뢰 설계자(trust designer)라 할 수 있다. 기술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신뢰는 정책결정자가 설계하여야 한다.
차기 미 연준 의장 인사를 둘러싼 논의는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도 진지한 성찰의 순간을 마주하게 하는 서사로 다가오고 있다. 연준 의장 후보의 AI 서사를 판단하는 통화·재정정책 역량이 긴요하다. 중앙은행과 재정당국의 장은 기술과 제도의 균형을 이루는 신뢰 설계자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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