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인정기준 완화 요구, 우선매수권도 못 쓰는 사례 많아
전문가들 "특별법은 완제품 아닌 시제품…국회의 A/S 필요" 지난달 4일. 요양병원 간병인으로 일하던 A 씨가 인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른바 '건축왕' 사건의 다섯 번째 사망자다. A 씨는 17년간 24시간 숙식 간병인으로 일하는 동안 아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세금을 떼인 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주변인들은 모두 전세사기 피해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5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전세사기 특별법'은 A 씨와 같은 불행한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려는 취지로 만든 법이다. 개별법이 아니라 '특별법'으로 한 것에는 부동산 투기꾼이 임차인의 주거기본권을 빼앗도록 방치했던 상황에 공동체가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있었다. 법이 통과된 지 100일이 됐다. 피해자들은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을까.
여전히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피해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조차 어렵고 인정받더라도 정부와 은행의 정책지원 요건을 갖추지 못해 대부분 지원대책에서 제외되는 등 특별법의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피해자 인정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기준인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만 '전세사기 피해'로 인정하는 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철빈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임대인의 사기 의도를 입증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라며 "임대인이 '바지사장'이거나 사망한 경우에는 피해자가 법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특별법의 가장 핵심 사항 중 하나가 경·공매 우선매수권이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이들은 호소했다. 신탁주택, 비주거용 오피스텔, 근린생활시설에 살던 세입자들은 경락자금대출을 받을 수 없다. 많게는 수억 원에 달하는 돈을 현금으로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불법건축물의 경우 이행강제금이 뒤따르는 것도 부담이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대출지원도 실효성이 높지 않다고 했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대책위원장은 "정부와 국회는 최우선변제금도 못 받은 피해자들에게 그만큼의 무이자대출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대상자가 5% 수준"이라며 "정부가 마련한 대출은 대부분 소득요건, 자산요건 등 사각지대가 너무 커서 사실상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 씨는 특별법의 지원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제대로 된 안내도 받지 못하고, 은행 창구나 법원, 세무서를 찾으면 기관마다 각각 말이 다르고 세부 메뉴얼이 없다며 지원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며 "칸막히 행정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면밀히 점검해 달라"고 호소했다.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반영해 추가 입법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도 오는 12월 특별법을 점검해 개정·보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이강훈 변호사는 "대출 정책만으로는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후속 입법을 통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윤남 전남대 건축학과 교수는 "현 지원 방식은 실제 피해자들의 현실과 피해양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제2·3의 피해자를 양산할 우려가 크므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다양한 맥락을 '전세사기'라는 좁은 개념만 갖고 담으려 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엄밀히는 대법원까지 가야 사기가 판별되는 것"이라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세입자 입장에서 사기인지 아닌지 대체 누가 어떻게 구분하겠느냐"고 꼬집었다.
김준우 대구대 건축공학과 교수 또한 "전세사기는 피해자들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였다"며 "언젠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이전까지 운 좋게도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일종의 사회적 재난에 가까운 만큼 단순히 개인과 개인 간 거래에서 발생한 사고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시각이다.
이어 김 교수는 "애초에 이 특별법은 일단 빨리 만든 뒤에 나중에 점검하고 보완하자는 가정을 하고 통과된 것"이라며 "지금은 '완제품'이 아니라 '시제품'으로 봐야 하는 만큼 고칠 부분이 많다. 국회에서 더 많은 애프터서비스(A/S)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KPI뉴스 / 유충현 기자 babybu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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