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나는 다시 살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3-08-18 09:08:21
국내 소개된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장편 두 종
고래와 나무의 혼에 의탁한 '홍수는 나의 영혼에 이르고'
"일본인들에겐 파국의 세계관이 이상할 정도로 빈약하다"
3·11 대지진, 그동안 써 온 작품세계 성찰한 '만년양식집'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우리'라는 인류는 이어져야"
전후 일본 사회를 비판적으로 탐구하며 핵으로 인한 파국을 쉼 없이 경계해왔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1935~2023). 지난 3월 타계한 그의 역작 두 종이 최근 나란히 소개됐다. 작가인생 전반부를 결산하는 장편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김현경 옮김·전2권·은행나무)와 마지막 장편 '만년양식집'(박유하 옮김·문학동네)이 그것이다.

▲지난 3월 타계한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 핵 오염수 방출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이즈음, 인간들이 빚어내는 파국을 다양하게 변주해온 그의 소설들이 눈길을 끈다. [은행나무 제공]

오에의 소설적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원폭으로 치명적인 비극을 경험한 나라의 지식인으로 생성된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인류의 절멸을 걱정하는 묵시록적 세계관과,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들을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며 변주하는 이야기가 큰 축이다. 전자를 가장 상징적으로 종합하는 장편이 1973년 내놓은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이고, 이 소설에서 설정한 파국이 반세기가 흐른 후 현실에서 재현되는 3·11 대지진 뒷이야기가 '만년양식집'에 집약돼 있다.

일본의 핵 오염수 해양 투기를 앞두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핵으로 인한 파탄을 걱정해 미리 벙커 속으로 아들과 둘이서 피신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태주의적 관점을 드러낸 '홍수는…'은 50년 전에 나온 작품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놀라운 동시대성을 생생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자신이 '가장 선량한 것, 즉 고래와 나무를 위한 대리인'이라고 여기며 이름마저 그 대리인의 본질을 상징하는 '오키 이사나'(大木勇魚)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남자가 중심인물이다. 이사나는 '의사들에게 백치라는 진단을 받았어도 눈은 깊고 조용하고 영롱하며 귀의 예민함은 누구와도 비교 불가한 진이라는 다섯 살 아이'와 함께 세상과 스스로 유리돼 핵전쟁을 대비해 지은 숲속의 '셸터'에서 살아간다.

-멀리서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떡갈나무가 보였다. 이미 석양이 짙어 잿빛의 강인한 막대 같은 게 둥근 시야 속으로 들어왔을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한참 동안 잿빛 떡갈나무를 바라보며 자기 내면에 그 떡갈나무가 상기시키는 것들을 증식하면서 결국 자신이 떡갈나무의 혼과 교감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날 깊은 밤, 바다가 부풀어 올라 지표까지 뒤덮어버려 궁지에 내몰린 사멸 직전의 고래들이 그를 찾아와, 셸터 콘크리트 벽을 손바닥보다 부드럽게 젖은 무게감이 있는 것, 즉 지느러미로 계속 두드렸다. 반쯤 잠이 든 상태로 그는 자신이 그런 존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느낀다. 그렇게 자기를 부르러 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현실 세계의 모든 관계를 포기하고 핵셸터로 옮겨온 것이라고 꿈속에서 생각한다.


이사나는 수시로 나무의 혼과 고래의 혼에게 말을 건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질문을 그렇게 혼잣말처럼 던지고 귀를 기울여 답을 듣는다. 실제 나무가 응답을 하고 고래가 반응할 리는 없지만 그는 특별히 그것들의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한다. 이사나가 나무와 고래의 대리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 또한 현실의 권력과 이권을 위해 괴물 같은 장인의 소아성애 범죄 행위 뒤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아직 죽지 않은 아이를 유기한 과오가 있다. 그는 그것의 업보로 '진'이 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병마에 시달리며 홀로 설 수 없는 '진'은 자연을 닮은 순수한 인간의 드문 상징이다.

-이 지적장애아는 적어도 50종의 들새 소리를 식별할 수 있어 그 새들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식욕에 필적하는 쾌락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기 내부의 울적함에 가로막혀, 두견새나 붉은배오색딱따구리, 쏙독새 소리처럼 특징적인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대부분 구별하지 못하는 이사나도 한없이 미세한 들새 소리와 그보다도 더 작은 아이의 소리를 매일 몇 시간 동안이나 온화한 기쁨을 느끼며 들었다.

이 숲속에는 이른바 '자유항해단'이라는 이름으로 결속한 결핍으로 가득한 일군의 소년들도 있다. 이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로, 영화촬영소를 철거하는 용역으로 일하다 쓰레기더미로 변한 공간 뒤에 숨어서 세상과 대결한다. 무기를 탈취해 무장한 이들이 이사나에게 접근해 그의 셸터를 부상자의 치료 공간으로 이용하고 이사나도 그들을 대변하는 '말'의 전문가로 포섭한다.

자유항해단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불온한 존재들이다. 부모의 자살로 언제든지 자신도 죽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 끊임없이 오그라드는 육체를 지닌 파괴적인 영혼의 소유자, 어린시절에 어른들에게 유기됐다는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 장애를 지닌 오빠를 둔 여자아이를 포함해 이 자유항해 무리들은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떨치고 공해상으로 나가 조만간 다가올 세계의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자위대원들과 충돌해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이들은 셸터 안에서 그들을 포위한 이들에게 외친다.

-우리들의 배에 대해 답하라, 우리들의 배에 대해 답하라! 우리는 변호 같은 거 필요 없다. 너희들의 법정이 내리는 판단 따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제군들의 형무소가 우리를 충분히 벌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그보다 제군들의 세계 그 자체가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우리들의 배에 대해 답하라, 우리들의 배에 대해 답하라! 대지진보다 앞서 자유항해단이 바다로 나가려고 하는 건 대지진에 도쿄가 괴멸하는 날, 너희들이 우리를 몰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학살로부터 미리 피난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환경오염이라는 대홍수가 다시 나타났는데도 일본은 히로시마 때처럼, 이번에도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생전 인터뷰에서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고래 울음소리가 가득하고 셸터가 물에 잠기는 가운데 이사나의 최후 저항으로 이어지는, 비장한 묵시록의 마지막 장면은 압도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장편을 두고 문학평론가 와타나베 히로시와 나눈 대담에서 오에는 "홍수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원폭을 경험한 일본인이 그렇지 않은 유럽인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대홍수라는 세계관에 있어서 거꾸로 둔감한 것 같기 때문"이라면 "히로시마에 대해 공부를 하고 10년 정도 지나고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참담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일본인들의 세계관 속에 멸망의 이미지는 '이상할 정도로' 부재함을 지적한 것이다.

2013년 마지막으로 출간한 장편 '만년양식집'은 반세기 전 '홍수는…'에서 예견한 재앙이 현실로 이어진 듯한, 2011년 동일본에서 일어난 '3·11 대지진' 후일담을 담고 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성물질로 오염된 현황에 대한 특집방송이 끝난 후 아내와 아들 몰래 계단참에 서서 '우우' 소리를 내면서 운다. 그는 "우리로 묶을 수 있다면, 그런 일을 우리가, 동시대의 인간들이 해버렸다"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복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 나는 노인의 울음소리를 냈던 것"이라고 썼다.

이 마지막 장편은 그가 써온 작품들을 여동생(아사)과 아내(치카시)와 딸(마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이 '세 여자가 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자신의 서술과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냉철하게 돌아본다. 아들이 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래 현실에서 그를 돌보는 것은 물론 소설을 통해 그 존재를 지속적으로 드러낸 오에게 정작 딸 마키는 "아빠는 아카리 오빠가 태어났을 때도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방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닌지, 아빠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딸의 비판은 이어진다.


-아빠는 지금까지 질리지도 않고 삼십 년, 사십 년 글을 써오면서,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노작가의 낡은 반복이라고 빈축을 산 적도 있었죠. 그런데 3·11 이후 비상사태를 맞고 나서야 겨우 마음에 걸려 딸한테 편집을 맡긴 사가판 잡지를 통해 우선 가족들의 반응을 보려 한 거라면 너무 황당한 자기 보신책 아닌가요?

그동안 써낸 작품들을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다시 성찰하는 이런 전개는 거장다운 '만년의 양식(樣式)'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마지막 소설 말미에 그가 진작 펴냈던 '유품의 노래'에서 선택한 시를 배치해 평생 추구해온 세계관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는 "누군가가 '3·11 이후' 쓰인 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는 걸 들었다"면서 "나 역시, 시 속에 나오는 나의 칠십 년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 시는 치카시의 말대로 일흔 살의 내가 여든 살이라는 정점으로 향하는 나 자신에게 보낸,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층 더 가혹할 '3·11 이후'에 살아남은 나 자신에게 보낸 편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다. 어디선가 소설 속 노인처럼 울고 있을 오에의 노래.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온 나라가 다 같이 전쟁을 했다./ 아이였던 우리는 노래했다./ 나라님 곁에서 죽고 싶네, 후회는 하지 않겠네,/ 나라님이/ 인간의 목소리로/ 전쟁에 졌다고 통고한 날/ 라디오 앞에서 교장이 서서 외쳤다./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 (…)/ 어머니는 탄식했다./ 아이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해도 되나?/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가 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살 수 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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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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