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남상운의 '방랑할 권리', 블루문 앞에서 '멍때리기'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 2023-06-16 00:47:13
길을 재촉하던 초로의 남자가 잠시 멈춰 선다. 유리창 넘어 자신의 눈을 홀린 작품들 때문이다. 결국,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갤러리 문턱을 넘는다. "이거 사진작품이죠." 시리도록 슬픈 '블루'의 향연 그리고 사실적 묘사에 남자는 궁금증이 발동했던 게다.

해프닝이 벌어진 곳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과 안국동 사이에 위치한 갤러리 '몬도베르'. 이곳은 조선 시대 미술관청이던 '도화서'가 있었던 유서 깊은 자리다. 남자의 궁금증을 풀어준 전시 기획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있는 일"이라며 웃어넘긴다.

▲남상운 작가가 지난 14일 UPI뉴스와의 인터뷰 중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Sims Green, SayArt]

작품의 주인공은 서양화가 남상운이다. 이번 전시는 그의 22번째 개인전이다. 주제는 '방랑할 권리, 알레만스라텐(ALLEMANSRÄTTEN)'이다. 확 트인 높은 천장 각 벽면 아래 걸린 그의 '블루문 시리즈'는 한여름 들이닥칠 '하장군(夏將軍)'마저 쫓아낼 기세만큼 시원스럽다.

그는 1998년 첫 개인전을 열며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다양한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2007년 첫선을 보인 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블루문 시리즈'는 단연 대표 연작이다. 작가의 세계관과 독특한 회화 방식이 집대성됐다는 평이 연이어 나오는 이유다.

'블루문 시리즈'는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의 영화 촬영장을 갔다가 우연히 마주한 '블루 스크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영화의 블루 스크린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나중에 그곳엔 다양한 모습이나 이야기가 형상화한다. 나는 이런 블루스크린이 마치 가상과 현실의 중간 지대인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가상이 마주한 이 시대, 나는 이 시리즈에 다양한 생각을 담고 싶었다."

▲ 블루문 시리즈 [Sims Green, SayArt]

햇수로 10여 년 이상 그는 '블루문' 연작에 매달렸다. 연작의 '블루' 코드를 찾기 위해서다. 그는 물감을 섞고 칠하고 말리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그는 '블루문'만의 '시그니처' 블루를 완성했다. 새파랗고 시린 그의 블루는 때론 슬프다. 때론 깊이를 알 수 없게 신비롭다. 이런 다층적 심상을 깨우는 그의 블루는 평면을 세워 입체를 만들고 돌연 블랙홀처럼 관객의 심상을 빨아들인다.

▲ 블루문 시리즈 [Sims Green, SayArt]

이 연작엔 '블루문'인 '연잎'이 언제나 주연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수백 번 붓질만으로 그려 '그러데이션'을 살린 이 잎은 말하자면 주춧돌과 같다. 물방울, 스파이더맨, 보이저 우주선, 어린왕자, 연잎 위 잎맥 등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오브제는 연잎과 대비되지만 저마다 조연 한자리쯤은 꿰차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해석은 섣부르다. 잎 위에서 사방으로 치닫는 잎맥이 서로 다른 꿈을 좇으며 아우성치는 인간군상으로, 물방울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상선약수로, 엠파이어맨(스파이더맨)이 세속 욕망을 상징하는 그 무엇으로 해석된다면 이들 모두는 갑자기 주연급으로 급부상한다. 성간 우주로 향하는 보이저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꿈을 좇는 인간사나 또 다른 세계로의 전의로 이해되면 보이저도 적잖은 개런티를 요구할 듯하다.

▲ 블루문 시리즈 중 엠파이어맨(스파이더맨) [Sims Green, SayArt]

"연잎을 모습 그대로 보지 않길 바라죠. 잎은 심연 나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수십 가지 블루도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젊음을 상징하는 청바지이든, 푸른 하늘이나 바다든, 또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도 결국 해석은 관객의 몫입니다. 다만 나는 가상과 현실이 맞물려 뒤엉킨 이 시대의 자화상을 나만의 방식대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 속에 유불선 동양사상이 뒤엉켜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에 대한 개별 해석도 중요하지만, 작품 전체가 주는 조화나 느낌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그는 "사실 엠파이어맨보다는 그와 연결된 거미줄이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죠"라고 했다.

블루문 시리즈의 또 다른 특성은 유화(Oil)로 그렸는데도 질감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리얼리즘에 가까운 구체적 묘사와 전체를 아우르는 블루의 다양한 변화는 한치 건너선 관객에겐 사진으로 오해할 만한 극도의 사실감도 준다.

▲ 블루문 시리즈 중 물방울 [Sims Green, SayArt]

전시 주제도 도발적이다. 스웨덴 헌법에 명시된 '방랑할 권리(ALLEMANSRÄTTEN)'를 타이틀로 빌려왔다. 방랑할 권리는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이 환경 보존을 전제로 법으로 보장한 '자연 접근권'을 말한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스트레스로 지친 몸과 맘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 작가는 "관객들이 블루문 시리즈를 통해 방랑할 권리를 찾길 바란다. 그림을 보며 지친 심상을 달래길 희망한다"고 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심상적 방랑'으로 '자신만의 의미와 감정'을 찾으란 거다. 전시장 한면 꼭대기에는 작은 '블루문 시리즈 소품'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있다. 마치 '방랑할 권리'를 상징하듯.

▲ 한 외국 관객이 전시를 기획한 홍명경 갤러리 몬도베르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Maria Kim, SayArt]

남 작가는 경기대학교 학부와 동 대학원를 졸업 후, 홍익대학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7월 영국 런던 초대전, 10월 호주 멜버른에서 개인전 등 해외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유엔의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행복도는 세계 59위다. 고도의 경제발달과 달리 국민 심상은 후진국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상운 작가가 던진 '방랑할 권리'는 큰 시사점을 준다.

그의 '방랑할 권리'는 이달 30일까지 이어진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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