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과 답습 아닌 가슴으로 세상 그리려"
"동서양 정서 '태극'처럼 어우러져 장단 맞춰"
과학자 눈, 예술가 손이 만든 '우연 가장한 필연' 성공적인 과학자의 삶과 안정적인 교수직을 벗어던지고 붓을 들었다. 평생 좇던 예술혼. 집안 반대에 부딪혔던 소년의 꿈은 장년이 돼서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추상화가 김만희의 얘기다.
그는 오십을 훨씬 넘은 2001년 첫 전시회를 열었다. 2005년엔 아예 현대미술의 큰 시장인 뉴욕으로 달려갔다. 오랜 세월 깊은 우물이 차고 넘쳤을까. 그는 하루 10여 시간 붓과 사투를 벌였다. 솟구치는 작품 욕, 독특한 과학자의 시선으로 탄생한 그의 작품들은 벽안(碧眼·푸른 눈)의 관객을 멈추게 했고, 전문가들의 호평을 끌어냈다.
그는 자신은 늦깎이라 낮춰 말한다. 사실 그는 수십 년 줄곧 뒤품에 붓을 숨겨두고 살았으니 재야의 고수로 봐야 옳다. "모방과 답습 같은 인위적인 그림이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화폭에 옮긴다"고 말하는 김만희 선생을 11일 만났다.
"난 사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요. 미술계 인사들과도 크게 어울리는 일도 많지 않아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꽤 알려진 추상화가다. 여러 전문가는 그를 두고 "통(通)하였다"고 말한다. "화가로서 물리가 텄는데 정식교육을 받지 않은 게 뭐가 문제냐"는 얘기다.
그가 도미한 해는 2005년이다. 그 후 그는 50년 전통의 미국 유명갤러리 '월터 위키저(Walter Wickiser Gallery)'에 픽업돼 뉴욕에서 꽤 그럴듯한 이력을 쌓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뉴욕이 그를 알아본 건 아니다. 국내외 미술 쪽으로 큰 이력이 없으니 아예 뉴욕이라는 큰 시장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도미 당시 그의 손에 쥔 것은 그나마 국내에서 그의 능력을 알아챈 유명 미술관 수장들이 써준 추천서 몇 장이 전부였다.
천우신조였던가. 그는 뉴욕에서 재미1세대 화가인, 지금은 작고한 포 킴(PO, 김보현) 선생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선생은 그를 단박에 품고 선뜻 자신의 작업실로 받아들였다. 또 선생은 그를 여러 유명갤러리나 언론사에 알렸다. 김만희의 회고. "선생님과는 10여 년 함께 지냈어요. 따로 그리는 법을 알려주진 않으셨지만, 함께 한 이따금 예술 화두를 제게 던지셨죠."
김만희의 그림은 추상화다. 추상표현주의라 해도 좋다. 그는 캔버스에 선을 긋고, 면과 면을 그린다. 어느덧 그가 겹친 면들 위엔 무채와 유채색 옷이 입혀진다. 다양한 선과 면 그리고 색이 어우러지며 저마다 생명력을 갖는다. 어떤 그림엔 수천 년 땅속에서 꿈틀거리다 땅 위로 솟구치는 용암의 뜨거움이, 어떤 작품엔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며 5000자 짧은 '도덕경'을 남기고 떠나는 노자의 만추가 있다.
그의 추상이 여타와 다른 점은 또 있다. 추상화가는 더러 자신의 잠재의식에 깔린 원초적인 욕구를 무차별적으로 화폭에 난사하거나 배변하듯 토악질하는 경우가 있다. 예술성은 차치하고 보는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건 뻔한 수순이다.
반면 그의 작품은 고운 채로 여러 번 걸러낸 듯한 '채수'처럼 정갈함이랄지 품격이 있다. 또 동서양의 정서가 '태극'처럼 어우러진다. 특히 이 두 정서는 싸우지 않고 휘돌아 장단을 맞추는 듯하다. 한국 작가란 이유로 애써 동양 정서를 갖다 쓴 흔적도 없다. 재료도 평범하지만 달리 보면 특별하다.
그는 대개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지만 더러는 잉크를 풀어 사용한다. 모르는 이들은 이를 두고 '먹'이라 단정한다. 물론 이렇게 풀린 잉크는 자연스레 동양의 멋을 준다. 그는 "과학자로서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다. 실험실에서 시료를 다루듯, 물감을 시료로 삼아 실험하고 관찰한다"고 했다.
예술작품엔 우연의 산물이 많다. 추상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추상화는 여기에 명료하지 않은 비구상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현령비현령'이라 비아냥거릴 수 있지만, '컨템포러리아트'가 '추상화'로 수렴한다는 점은 추상화를 단박에 정의하거나 재단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우연'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결은 다르다. 그의 '우연'은 과학자의 눈과 손이 만들어 낸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어린시절 단박에 화가가 되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수재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국가의 이공계 국비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돼 해외 유학길에 나서야 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화두이던 시절에 나랏돈 받고 떠나는 해외 유학생이 됐으니 화가를 '환쟁이'라 낮게 부르던 시절 '예술가가 되겠다'는 말은 집안에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가 정점이던 2020년 귀국했다. 서울 송파 몽촌토성역 인근에 작업실도 내고 분주하게 전시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 미술계는 뿌리 깊은 학연과 지연, 인맥으로 쌓여 있지요. 때론 이런 이유가 진정성 있게 작품활동을 하기 어렵게 합니다. 나는 이런 폐단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활동을 하려 합니다." 특별히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는 김만희 선생의 이야기는 새롭게 등단하는 후학들을 위한 고견일 것이다.
그도 어린 시절엔 정물화나 풍경화, 인물화 같은 일반적인 구상화를 그렸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보이는 피사체 이상의 것을 화폭에 담는 방법인 비구상, 즉 추상에 깊게 심취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제 보는 것이 모두가 추상화로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추상화에 통(通)하였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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