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탁구장에서 건져올린 동화, 잘 지는 법"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3-05-03 10:17:12
'탁구장의 사회생활' 펴낸 어린이문학 작가 박효미
경쟁 사회 축도 탁구장에서 배우는 '꿇지' 않는 법
뻔한 기승전결 아닌, 생생한 인물의 웃기는 이야기
"어린이는 단순한 교육 대상 아닌 독립된 인격체"
-한마디로 쉬운 일이 없다. 세상천지 일이 다 그렇다. 탁구공 하나 네트 넘기는 것도 쉽지 않으니, 대체 만만한 일이 뭐가 있으랴. 간신히 공을 치는 걸 익히니, 공이라는 게 회전을 한단다.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곧바로 바닥이다. 어제는 이겼지만, 오늘은 진다. 지난주에 알았던 드라이브를, 이번 주에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에이, 포기할까?

▲탁구장을 배경으로 새로운 형식의 신작 동화를 펴낸 어린이문학 작가 박효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세웅은 열 살쯤 되는 초등학생이다. 아빠가 혼자나 다닐 것이지 깍두기로 끼워넣는 바람에 어쩌다 탁구에 빠져버렸다. 베란다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고 햇빛에 몸을 꽝꽝 말려 인간 쥐포나 되고 싶었다. 탁구장에 가면 1부에서 8부, 그 다음 '희망부'까지 실력에 따라 피라미드 형태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희망부에서 벗어나 한 계단씩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 집 앞 탁구장에서 폭탄머리 아줌마의 딸 '화요'를 만나 들뜨고 그 아이 앞에서 멋지게 박종두를 이기고 싶은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어찌할까.

어린이문학 작가 박효미가 최근 펴낸 '탁구장의 사회생활'(전2권·최미란 그림·만만한책방)은 경쟁에서 헤어나기 어렵고 재화나 능력이나 출신성분을 기준으로 피라미드가 형성되는 세상의 축도로 여길만한 탁구장을 배경으로, 잘 지는 법과 져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키워주는 동화다. 유머가 곳곳에 살아 있고 기승전결 형식의 뻔한, 이기는 스포츠 동화가 아니라, 생생한 현장을 살아 있는 캐릭터로 흥미롭게 전개한다. 만화 스타일 삽화가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받쳐준다.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어린이 해방 선언'을 발표한 지 100년이 흐른 5월이다. 애초에 방정환이 정한 어린이날은 노동절인 5월1일이었지만, 1946년부터 5월 5일로 바뀌었다. 어린시절부터 쉽사리 노동에 동원되는 아동들의 인권을 환기하고 무감각한 어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날이었던 셈이다. 한 세기가 흐른 변화된 환경에서 이즈음 어린이들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까. 새로운 스타일의 신작 동화를 펴낸 박효미를 만난 배경이다.


"좋은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라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세가 우선 필요하겠죠. 어린이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성장시켜서 좋은 어른으로 만드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각각 다 독립된 개인 인격체로서 각자 어른처럼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그런 인식이 살아 있는 문학입니다. 어떤 어린이든 다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거고, 문학에서도 그런 것을 보여줘야죠. 유행을 좇지 않고 다양한 작품들이 각각 개성이 넘치는 어린이들을 담아낸다면 좋겠죠."

박효미는 2005년 MBC창작동화 공모에 당선돼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일기 도서관' '블랙아웃' '이구아나 할아버지' '오메 돈 벌자고?' 등 학교 현장과 어린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주로 자신이 몰두했거나 체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실감나게 이야기를 꾸려내온 그는 이번에도 오랫동안 탁구에 몰입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지난 연말에는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지원으로 슬로베니아에 머물면서 그곳 탁구장들도 섭렵해, '글로벌 생활체육인'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어요. 기승전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싶었어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고 이기는 이런 이야기는 너무 뻔하잖아요? 웃는 게 좋아요. 오래된 것들이 우중충한 동네의 작은 도서관에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무렵, 상주작가로 근무하면서 나를 웃기는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보자는 심산이었어요. 오늘은 어떻게 재밌는 이야기를 써볼까, 그렇게 하나씩 써나간 거죠. 내가 1차 독자인데 우선 나부터 좀 웃기자, 이런 거죠."

▲박효미는 "좋은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재미있고 웃기는 유머코드를 놓치지 않되, 딱딱한 교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행간에 숨겨둔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는 일이죠.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져요? 매일매일 나에게도 지고 친구에게도 지고 나도 모르게 경쟁을 하지요. 아이들도 아침에 학교 가는 순간부터 경쟁이잖아요? 왜 아침에 늦게 일어나 지각하는지, 또래는 책을 잘 읽는데 나는 잘 못 읽고, 짝꿍은 대답을 잘하는데 나는 말을 못하고… 누구는 일기를 잘 쓰고, 또 어떤 친구는 받아쓰기도 잘하고 마음속으로 이기고 지는 일은 수없이 일어나죠. 정작 세상에서는 지는 일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 때문이죠. 탁구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이기고 지는 게 너무 분명하죠. 거기에서 아이가 지면서도 '꿇지' 않는 길을 걸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주일 동안 일어난 가상의 대규모 정전사태를 다룬 박효미의 고학년 대상 장편 동화 '블랙 아웃'은 토론 대상 도서로 오래 사랑받고 있다.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리적인 환경뿐 아니라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까지 아우르는 이야기다. '일기 도서관'은 도서관 벽으로 난 비밀 일기도서관에서 일기들을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20여년 가까이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다. 

▲박효미는 "아이들이 책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좋은 동화나 그림책을 함께 소리 내어 읽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효미는 "집필할 때 캐릭터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만들어놓은 인형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데 우선 집착한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즈음 한국 어린이문학의 현단계는 어떠할까.

"어린이문학도 굉장히 힘든 상황이에요. 만화 학습서 등 어린이책 분야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이 가장 어려워요. 동화 읽는 어른들 모임이 활성화됐었는데 이제는 예전만큼 안 읽어요. 다 함께 어른들이 동화를 읽고 그 책에 대해서 같이 토론하면서 좋은 어린이문학을 이끌었는데, 지금은 어른도 책을 읽지 않고 그냥 어린이는 다시 잘 키워야 될 교육의 대상이 된 거 같아요."

각 학교에서 '필독서'를 지정해 그나마 아이들 독서 교육을 하고 있지만, 그 책 말고는 다른 책들이 소외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아이들도 자극적인 것에 민감해서 갈수록 독해력 혹은 문해력이 떨어지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많은 학교에 독서 강연을 다니는 그는 진도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조도'라는 섬에서 마주친 교사와 학생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곳에는 섬 밖에서 출퇴근하지 않고 기숙사생활을 하는 초임 남자 교사들이 열정적으로 아이들과 방과후까지 함께 생활했는데,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교사를 존경하는 태도가 역력하더라고 했다. 도시에서는 본 적 없는, 작가의 강연을 연필로 메모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박효미는 "피곤하고 우울해도 웃을 수 있는 건 소중하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자극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아이들을 좋은 이야기로 안내할 방법은 없을까. 박효미는 "아이들과 함께 소리 내어 그림책을 함께 읽으면 좋다"면서 "눈으로 읽는 것과 소리를 내서 읽는 건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그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나 갈증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면서 "함께 소리를 내어 읽는 일은 그것을 발견하고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탁구장에서 동화를 건져 올린 작가의 말.

-꽃샘추위와 어둠이 찾아들던 순간 가장 웃기고 재밌는 일을 생각했다. 쓰면서 킬킬댔고, 다시 읽어 보며 낄낄거렸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공간을 채웠다. 기분이 좋아졌다. 탁구 이야기이지만, 날 웃게 했던 이야기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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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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