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인간들은 서로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3-04-27 10:31:23
새 장편 '딩' 펴낸 김승옥문학상 수상작가 문진영
바닷가 마을 배경으로 서로 온기를 건네는 인간들
각자 상처 품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구원
"얼굴도 모르지만 나와 이어진 존재 마음으로 발견"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불편하게 만들어 우리 안의 금기를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게 만드는 책(문학)의 역할을 강조한 말일 터이다. 논쟁을 촉발시키고 무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근성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따스한 위로와 더불어 각성에 이르게 하는 역할 또한 문학에 기대는 것은 여전하다.

▲새 장편을 펴낸 소설가 문진영. 그는 "대단한 서사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생겨나는 인물들을 그냥 찬찬히 들여다보며 쓰고 싶다"고 말한다. [현대문학 제공]

문진영의 새 장편 '딩'(현대문학)은 읽는 이들의 언 몸과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국물 한 그릇이고 싶다. '딩'(Ding)은 서핑 보드에 뭔가 부딪혀 난 상처를 뜻하는 용어. 소설 속 인물 P는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라면서 '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라고 흔연하게 말한다. 정작 그는 유서도 없이 홀연히 파도가 없는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소설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5명의 사연을 각 장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소개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서로 온기를 주고받았는지 이어간다.

-아버지가 나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요. 잘못한 게 없으니 용서할 수도 없는데, 용서가 안 돼요. 그게 미안해요.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요.

지원은 바닷가 마을을 떠나는 게 소원이었고, 일찌감치 그 소망을 이루었다. 여섯 살 때 죽은 엄마의 유품을 태웠고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가는 어부 아버지와 살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객지에 정착해 살면서 아버지에겐 곁을 주지 않았다. 대장암 말기인 줄도 몰랐던 아버지가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난 뒤 지원은 '생선 눈알을 빼 먹는다는 이유로,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 고래를 잡았다는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로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그렇게 평생 혼자, 혼자서 외롭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자책한다. 무감각한 타인이 보기엔 '고작 그런 이유'일지 모르지만 반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공간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을 무시하는 건 무심한 일이다. 지원이 뜻밖에도 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건 누군가 바닷가 등대 아래 올려놓은 귤 하나였다.

지원의 단짝이었던 주미는 바닷가를 떠나지 못한 채 어머니와 모텔과 호프집을 운영하는 처지다. 어느날 401호에 투숙한 남자가 목을 맸다. 이 남자와 하와이에서 인연을 맺었던 한국계 하와이 여자 재인이 다시 그 방을 찾는다. 뱃일을 하는 베트남 출신 노동자 쑤언은 동료 일꾼 방글라데시 출신 마수드가 그들의 컨테이너 숙소 화재로 죽은 뒤 모텔에 온다.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홀로 떠나버린 남자를 찾아 큰 슬픔을 안고 바닷가 마을을 찾아온 재인, 동료의 죽음을 겪은 쑤언, 모텔 앞마당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다리가 불편한 영식, 이들의 공간을 관리하며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한 주미. 이들이 세상의 파도와 부딪쳐 맺힌 '딩'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고 치유되는 인연의 고리를 형성한다.


"거창한 건 없고 그냥 사람들이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하고 친절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누군가랑 연결되어 있다는 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가지고 쓰고 있어요."

전화로 만난 문진영은 느리지만 선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말했다. 2009년 창비장편소설상에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이 당선돼 작가로 나선 이래 공백기를 거쳐 2021년 김승옥문학상을 받으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대학 재학 중 썼던 등단작은 20대 젊은이들의 위태로운 삶을 담았거니와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써낸 두 번째 장편은 지나온 세월만큼 폭이 넓어졌다.

"첫 장편 쓸 때는 사실 제 얘기가 아닌 다른 사람 이야기를 상상하고 쓴다는 게 어렵게 느껴졌어요. 지금은 오히려 제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좀 바뀐 것 같아요. 뭐랄까,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어렸을 때는 저 자신에게밖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제는 타인들의 삶, 타인들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게 더 즐겁고 하고 싶은 일이 됐어요."

이번 소설의 특징은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선형으로 구축되는 게 아니라 물고 물리는 순환형 구조로 전개되는 점이다. 쑤언이 그의 '신'을 향해 등대 아래 올려놓은 귤 하나가 지원이 아버지와 누렸던 어린시절의 따스한 장면을 밝히고, 지원의 귀향이 주미의 오랜 안타까움을 걷어내면서 존재 의미를 찾게 만들거나, 어린 주미로 인해 삶의 밑바닥에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영식, 그가 다시 자신도 모르게 쑤언에게 전달한 '믿을 수 있는 힘', 증조할머니의 나라 바닷가에서 유전자에 새겨진 기후와 먹거리로 마침내 기쁨을 찾아내는 재인, 이들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뒤를 이어 순환하는 구조다.

▲문진영은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더 다정하고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문진영 제공]

"폭설을 중심으로 시간이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느껴지도록 쓰고 싶었어요. 시간이 선형(線形)이면 이 연결들이 그냥 쭉쭉 이어지다가 소설 안에서 선으로 되어버리잖아요. 그렇지 않고 이게 좀 순환하면 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겠다,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 마음이겠죠. 그냥 이야기가 끝나도 그 연결이 어딘가에서 계속 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한 뒤 다듬어 단행본으로 내는 '핀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쑤언의 이야기로만 독립된 장은 없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 5부를 추가한 것인데, 1부에서 지원이 '고작 그런 이유'로 아버지를 외면했다는 내용이 잘 설득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생선의 눈알만 파서 먹고 대형 밍크고래를 잡아 크레인에 매달아놓고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좋아하는 이들이 사는 공간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측면을 보충했다. 5부에서는 쑤언이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목격한 뒤 베트남에 두고 온 딸 '누'에게 편지를 쓴다. 쑤언은 베트남어로 '봄'이고, 누는 '꽃눈'이다. 봄이 꽃눈에게 고백하는 사랑.

-누에게. 새벽에 고래를 보았다. 커다란 섬 하나가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 같았어.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네. 만약 꿈이 아니라면, 아빠가 본 건 아마도 고래 등의 일부겠지. …순간 아빠는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지. 예전에 딱 한 번 똑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고. 갓 태어난 세상 못생긴 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말이야.

지원이 바닷가 마을을 떠난 뒤 '남겨지고 갇힌 사람'이라는 자의식으로 힘들어하던 주미는 지원이 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내려와 그녀를 찾아왔을 때 비로소,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녀가 지원과 함께 자고 일어나 먼저 나가며 북엇국이 끓는 동안 남긴 메모는 '국이 식었으면 데워먹으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쑤언이 늦잠을 자자 영식이 먼저 나가면서 신문지에 날아가는 듯한 글씨체로 적어놓은 메모도 '국 데펴먹어'였다.

▲문진영은 '별달리 애쓰지 않고도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만드는 사람'을 지어냈다. [K-Arts TV]

"제가 좀 추위를 잘 타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따뜻한 거 먹으면 진짜 몸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따뜻한 국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렇게 몸이 녹기를 바라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독립된 장으로 따로 존재하진 않지만 방글라데시에서 온 마수드야말로 작가가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로 상정한 인물처럼 보인다. 독감에 걸려 조업을 못 나가고 숙소에 누워 있다가 변을 당한 그는 '별달리 애쓰지 않고도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눈길을 끌고 화제를 지향하는 콘텐츠 위주의 유행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서사를 펼쳐가는 문진영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데 저는 그걸 좀 잘 못 따라가는 사람"이라며 "그냥 저는 제가 쓸 수 있는 거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올 여름에는 또 하나의 경장편을, 연말에는 두 번째 소설집을 묶어낼 예정인 그는 "저는 아마 계속 이렇게 쓰게 될 것 같은데, 대단한 서사는 아니더라도 그냥 마음에 생겨나는 인물들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볼품없는 구원'을 믿는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와 이어진 존재들을 마음으로 발견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가 분명히 건네받은 이 온기는, 누군가로부터 누군가를 통해 기어이 내게 도착한 것이라고. …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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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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