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도 복지 체계의 한축…역할 재분담·강화해야
세제 개혁 통한 새 재원 마련이 연금 개혁 돌파구
국민연금 개혁은 대선 공약이었다. 여야 후보 모두 약속했다. 갈 길은 멀다. 공회전하다 이제 겨우 시동이 걸렸을 뿐이다. 게다가 안갯속이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안에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국민연금에는 '용돈연금', '세대착취', '기금고갈','제도붕괴'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불신이 크다.
이런 불신을 해소하고, 저부담·고수익 구조 탓에 미래 세대에게 지워질 부담을 덜어주는 게 연금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금보험료를 올려서 연금기금의 재정안정 방안을 마련해도 지금처럼 심각한 노인빈곤을 완화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재정안정과 더 확실한 노후보장은 상충하는 목표다.
눈을 돌려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그러면 모두를 만족시킬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 국민이 내는 세금과 사회보험료의 역할분담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공적연금제도의 구조조정, 연금 사각지대 해소, 노후보장 강화 등 과제를 제시하고 해법을 모색해 본다.
국민연금이라는 코끼리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지 오래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서로 다른 곳을 만지면서 각기 다른 처방을 내리고 있다.
국민연금은 설계 자체에 결함이 있는 데다 전례 없이 급속한 저출산과 고령화가 엎쳤다. 게다가 정치권과 정부는 정기적으로 해야 할 연금재정 안정화 조치를 지난 15년 간 방치함으로써 병세를 악화시켰다.
이제 국민연금제도 안에서만 그 치유책을 찾을 수는 없을 듯하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과의 관계,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 및 특수직역연금과의 연계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가 가시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각 연금들의 기능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연금개혁은 다시 더 복잡한 미로 속에 빠진 형국이다.
국민연금의 저부담-고수익 구조와 뒤틀린 역할분담
산 속에서 길을 잃으면 확실한 갈림길까지 되돌아가 보는 게 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연금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1988년에 도입됐다. 도입 당시 독일을 모델삼아 소득대체율을 70%로 높게 설정한 반면 보험료는 3%로 낮게 책정했다. 소득대체율은 연금 가입기간 중 평균소득의 현재가치 대비 연금액 비율을 말한다.
강제적 연금 도입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이런 선심 쓰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두 차례 개혁을 거친 지금까지도 '저(低)부담-고(高)수익' 구조를 온존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출범 당시 대부분 나라들과 달리 소득재분배 기능까지 떠맡았다. 이는 당시의 취약한 소득분배 실태를 감안한 것이었다. 국민연금은 연금지급액을 산출할 때 자신의 가입기간 평균소득(B값) 뿐만 아니라 전체 가입자 평균소득(A값)을 더한 값을 변수로 삼는다. 여기에 각자의 가입기간과 급여상수(현재 1.2)를 곱하여 급여액을 산출한다. 이 과정에서 급여액은 하후상박으로 조정된다.
그러나 4대 사회보험 가운데 국민연금은 자본주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제도다. 이념 스펙트럼의 왼쪽부터 열거하자면 산업재해보상보험, 건강보험, 고용보험, 국민연금 순이다. 산재보험은 사업자가 돈을 갹출하고, 근로자가 혜택을 받는다. 건강보험은 모든 국민이 능력에 비례해 내지만, 혜택은 동일하게 받는다. 고용보험은 노사가 함께 내고, 혜택은 기여분의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거의 비슷하게 돌아간다. 반면 국민연금의 노령연금은 가입자가 낸 금액에 대체로 비례해서 받는다.
국가복지체계의 다른 한 축은 국가재정이다. 정부는 절대빈곤층, 장애인 가구, 노인 빈곤층, 영유아 보육과 노인요양 등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사회복지부문 지출을 통해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이 가운데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노인 빈곤층을 위한 제도로, 소득 하위 70%에게 2023년 현재 1인 가구 기준 최대 32만3180원을 주고 있다.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과 부분적으로 연계해서 운용되지만, 예산은 전액 정부에서 지원한다. 즉 정부는 공적연금에 이미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 2021년의 경우 기초연금 예산은 22조5000억 원이었고, 고령화 가속화로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기초연금은 노인빈곤 완화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기초연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너무 적다는 점에서, 중·상위층에게는 못 받거나 국민연금과 연계해 감액된다고 해서 불만이다.
더 큰 그림으로 저소득층 노후보장 위해 재정역할 강화해야
결론부터 말해서 빈곤층의 노후보장, 더 솔직하게 노인의 최저생활보장을 위해서는 연금제도가 아니라 국가 재정이 나서야 한다. 이제는 더 큰 그림으로 눈을 돌릴 때다. 정부가 사회복지 지출과 연금제도의 역할분담을 다시 설정함으로써 각 부문의 비효율과 불만을 제거하고, 늘어나는 국민 부담을 완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요컨대 고도성장 전략에 맞춰 골격이 마련된 세제를 국가 위상과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그런 세제 개혁의 핵심은 시대에 뒤처지거나 효용이 다한 산업보조금과 조세감면제도를 대폭 없애 재원을 마련하고, 사회복지 지출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GDP(국내총생산)대비 사회복지지출은 2019년 기준 12.2%로, 미국(18.7%), 독일(25.9%), 일본(22.3%, 2017) 등에 비해 상당히 낮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은 20.0%였다. 2010년 OECD 회원국들의 사회보장비 지출 평균은 경제 활성화 지출의 대략 두 배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후자가 전자의 두 배였다. 당시 GDP의 10%에 못 미쳤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 비중이 그동안 늘긴 했지만, 아직도 더 늘릴 여지가 크다.
연금제도 하나만으로도 합의가 이렇게 어려운데 민감한 세제개혁까지 어떻게 하느냐는 반론이 응당 나올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세제 때문에 당장 사람과 자연이 죽어가고 있다. 문제투성이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막지 못한,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 끊이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6명이 자살하고, 그 중 1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아직도 과도한 사회간접자본 예산 탓에 불요불급한 도로와 교량을 놓느라 전국의 산과 강이 파헤쳐지고 있다.
하승수 '세금도둑 잡아라' 공동대표는 무분별한 조세지출과 불합리한 보조금, 토건예산을 줄이는 것만으로 대체로 50조 원은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서 '배를 돌려라'에서 말했다.
세제개혁에 성공하면 늘어난 재원으로, 필요할 경우 일부 증세도 병행해서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분리해 노인빈곤 퇴치를 전담하는 더 크고, 탄탄한 제도로 변모시킬 수 있다.
기초연금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흡수통합하거나 별도의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해 그것과 결합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국민(노령)연금은 소득비례연금으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연금개혁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인 보험료율 인상폭과 소득대체율 높이기 논란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보험료를 안 올리거나 덜 올려도 된다는 말이다.
박용하 순천향대 교수는 최근 언론 기고문에서 "기초연금액을 40만 원 수준으로 높이는 상황에서 국민연금과의 기능 재정립 필요성이 제기된다"면서 "(모든 국민이 같은 보험료를 내고 같은 금액의 연금을 받는) 일본식 기초연금으로 갈 것인지 스웨덴식 최저보장연금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결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KPI뉴스 / 임항 사회전문기자 yh@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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