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경숙 "시대의 피뢰침 돼 벼락 맞더라도 당당히 맞서고 싶다"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 2023-01-12 02:02:33
팔색조 인생 거치며 담금질…'사랑과 평화' 화두 화폭에
20일까지 비채아트뮤지엄서 개인전…'축복하는 새' 등 23점
'장미꽃 향기를 아시나요? 견디고 또 견뎌낸 장밋빛 인생을 아시나요?' 화가 임경숙이 펴낸 시집 '그리움의 수혈을 거부합니다'에 수록된 시 '장밋빛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가이자 시인, 수필가이자 행위예술가로 격한 인생을 살아온 임경숙의 삶은 이제 그는 시처럼 장밋빛 인생이 됐다. 예술가로 '처음'이라는 영광도 누렸고, 인간으로서 '절망'의 순간도 숱하게 겪었다. 그러다 마침내 '견디고 또 견뎌낸 장미'로 만개했다.

개인전을 진행하느라 여념없는 화가 임경숙을 지난 8일 UPI뉴스가 만나 그가 토해내고 있는 예술론을 들었다.

▲ 자기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화가 임경숙.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 8월부터 그의 작품 '축복하는 새(Blessing bird)'는 방탄소년단, 한류 음식 등 한국을 대표 콘텐츠와 함께 인천공항 디지털 전광판에 상영되고 있다. 한국을 찾거나 떠나는 이들은 이 작품을 보고 "축복을 받은 것 같다. 유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의 작품엔 괜한 무리가 없다. 난해함으로 관객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그저 보고 느끼면 그만이다. 이런 공감은 간결한 구성과 원색의 강렬함이 원천이다. 매번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과 과장된 '눈썹'도 한 역할 한다. 그런 눈이 "예술 원천"이라고, 임경숙은 말한다. "말이나 새나 사람이나 눈을 통해선 있는 그대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임 작가의 작품이 만개한 꽃처럼 되기까진 부단한 노력이 따랐다. 이젠 고인이 된 박용숙 평론가는 그에게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선 1000점 이상 그려야 하고 큰 작품도 자주 그려라. 더 중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 철학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조언을 그는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무언가 닮은 듯하지만, 한국인 작가만의 정서가 배어 있다. 여백과 붓을 스친 듯한 굵은 선이 주는 동양 정서 때문일 것이다. 캔버스 표면을 지배하는 블루는 작가에게 평화 코드지만 여러 작품의 연결 수단이기도 하다. 그가 추구하는 평화와 사랑이라는 예술 화두 때문일 터다.

그는 자신이 광기가 있다고 한다. 광기는 집념과도 상통한다는 설명이다. 한번 마음이 발동하면 무릎이 깨져도 한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런 광기는 자신에겐 하늘이 내린 축복이란 얘기도 들려줬다. "멈춰지지 않는 광기. 하지만 예술가의 미침과 일반인의 미침은 본연이 다르다. 예술가는 언제든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탄력성이라 말한다. 나의 광기는 그런 것이다."

임경숙은 해남 사람이다. 어린 임경숙은 저녁놀에 취해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딱히 시를 배울 도리가 없어 매일 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내적 충동은 그렇게 글로 처음 시작됐다.

▲ 임경숙 작가. [이상훈 선임기자]

"어린 시절 뭉크의 절규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다른 이들은 르누아르의 그림 같은 부드러운 것을 좋아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어린 맘에 뭉크가 실제 인생을 그렸다고 생각했거든요. 뭉크가 좋아서인지 그때부터 처절하게 강렬한 것이 좋았어요. 리스트의 랩소디가 좋았고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좋았어요. 돌이켜보면 어렸지만 왜 사는지. 신은 있는지 같은 원초적인 것에 궁금증이 많았던 것 같아요."

임경숙은 1985년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아시아 여성으로는 처음 패션쇼와 퍼포먼스를 열었다. 벽안의 이방인들 앞에서 펼쳐진 작은 동양 여성의 퍼포먼스는 작지만 즐거운 파문을 만들었다. 당시 조국의 대형 방송사들은 이를 앞다퉈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행위예술가로 더 알려졌지만, 본업은 다양한 유화와 아크릴 작품들을 그리는 화가다. 뉴욕 플러싱타운홀 초대개인전, 조선일보사미술관 개인전, 미국시카고미술관 단체초대전과 두바이 아트페어 등 그는 세계를 돌며 작품들을 선보였다.

엄혹한 1980년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고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위해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당시 그는 머리를 자르며 시대의 억압에 저항했다. 서울 대학로 바탕골 예술극장에서 열린 퍼포먼스에선 극장 전체에 검은 천을 두르고 관까지 끌고 와 신들린 예술혼을 펼쳤다. 많은 이들이 이를 보고 '당찬 행위예술'이라 했지만, 군사정권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재주가 많으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임경숙의 삶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머니였고 시인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상업 디자이너였던 그는 때론 옷을 바꿔 입어야 했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캔버스 앞에선 선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 임경숙 작가. [이상훈 선임기자]

"그래도 굶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행복했지. 삶이 버거울 때마다 '먼저 간 고갱과 이중섭'을 생각했어요. 그들은 배를 주리며 그렇게 떠났는데 나는 그들보다 낫지 않은가."

임 작가는 "사실 적당히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그들을 뛰어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고갱은 40에 시작해 57에 떠났고 타히티밖에 가 보지 못했지 않은가. 나는 더 많이 보고 더 살았으니 더 멀리 가고 싶다"고 했다. 괜한 객기일까. 그의 그런 손짓과 발짓엔 인간사 저편의 무엇이 있는 듯했다.

임 작가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지론도 폈다. "예술가의 삶이 노력해도 지하 곰팡내만 맡아야 한다면 소용없다"고 했다.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고 그 원동력으로 또 다른 예술혼을 지필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반성도 줄곧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치열한 발버둥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의 어린 시절 섣부른 열정과 광기는 어느덧 화덕과 찬물을 오가며 담금질을 견딘 단단한 쇠가 돼 있었다.

임 작가는 말미에 "나는 시대의 피뢰침이 돼 벼락이라도 맞으며 당당히 서고 싶다"고 했다. 숱한 격함을 견디며 통제된 광기로 새로운 작품에 맞서겠다는 얘기다. 또 그는 "르누아르를 이제야 이해할 듯하다. 그의 부드러운 그림도 격한 인생을 넘어 도달한 것이란 걸 이젠 알게됐다"고 했다.

임경숙 작가는 연이어 작품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달부터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Love and Peace'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이달 20일까지 계속된다. 세간의 화제가 된 '축복하는 새'를 비롯해 '은혜로움' '향기롭게' '연인' '인연' '영혼의 빛' 등 그의 23점이 관객을 맞고 있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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