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으로 감싸안는 인간의 울퉁불퉁한 모습들
힘들어도 사람의 선함을 믿는 태도의 깊은 울림
"서 있는 자리에서 나와 이웃들 이야기 들려줄 것"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건 자명하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눈높이가 다르면 똑같은 모습이 아니다. 쓰는 자들의 자리에 따라 그들이 묘사하는 인물과 세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자리와 높이에서 인물과 세상을 볼수록 그들이 그려내는 삶의 축도는 더 입체적이고 깊어질 터이다. 대체로 쓰는 자들이 이른바 '지식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런만큼 어떤 자리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사각지대가 많다. 이즈음에는 드문, 노동자의 삶과 세계관을 뼛속 깊이 체화한 장남수의 첫 소설집 '파문'(강)이 눈에 띄는 배경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 작은 공장들을 다니다 19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로 호가 높았던 원풍모방에서 일하며 청춘을 보냈던 장남수(65)는 1982년 국가의 폭압적인 노조 해체에 직면해 해고된 후 옥살이까지 했다. 그가 이 과정을 기록한 '빼앗긴 일터'(1984)는 당대 많은 이들을 각성시켰고, 이후 거제로 내려가 조선소 해고 노동자와 결혼해 NGO 활동을 이어왔다.
에세이나 인터뷰 같은 쓰기 작업도 이어갔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오랫동안 식지 않았고, 2007년 쉰살 문턱에서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그 해 성공회대 사회학과 진학까지 이루어냈다. 자전 에세이 '빼앗긴 일터, 그 후'(2020)도 펴내면서 오래전 노동운동 세대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역정은 올 초 펴낸 첫 소설집으로 이어져, 멀리 돌아왔지만 이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제주에서 살고 있는 그를 전화로 만났다.
"소설은 어릴 때부터 늘 쓰고 싶었어요. 에세이나 인터뷰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어떤 감정들은 다 담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데, 소설은 폭이 넓어서 내 이야기를 넋두리하듯 쓰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40년 전 '빼앗긴 일터'를 읽었던 분들이 잊지 않고 반가워해주시더군요. 고맙고 용기가 커져서 이제 본격적으로 공단을 배경으로 삼은 장편을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한 단편들은 '노동'을 표나게 앞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인간들의 울퉁불퉁한 면을 응시하면서 '짠한' 연민으로 감싸는 정서가 지배한다. 대체로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장남수는 그들을 껴안고야 만다.
가장 역할을 하며 공장들을 전전하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네일아트 노동으로 살다가 귀국해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는 언니('물들인 날')는 동생에게 얄미운 존재였다. 공장에 간다는 언니 대신 남의 집 심부름하는 더부살이로 갔는데, 주인집 늙은 남자의 성추행에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언니는 정작 간다던 공장은 바로 안 가고 한참 있다가 떠났다. 피차 어려운 처지에 노동의 삶을 살아왔지만 활달하고 대찬 성격의 언니 아래 동생은 속을 끓였던 처지, 이제 긴 미국 생활에서 돌아와 다시 허름한 방을 구하고 일자리를 찾는 언니를 보면서 옛일을 떠올리는데 언니가 미국에서 평생 해오던 네일아트 솜씨를 동생에게 발휘하려고 한다.
-졸음을 걷은 언니 얼굴을 보며 나는 못 이기는 척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부터 약지, 중지, 검지, 미국 여성들의 손톱을 꾸며주던 언니의 창백한 손끝에서 한밤중 내 손톱이 발그레해졌다. 햇고구마 색깔이었다.
화해와 연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은 없다. 다만 언니가 동생의 손톱에 구현해낸 '햇고구마 색깔'이 폭넓게 모든 감정을 감싸안을 따름이다. 짧은 문장에 여러 감정이 응축돼 따스한 여운을 남긴다. 제주 살이의 체험이 담긴 '그 집에는'에 등장하는 여자는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집주인이다. 낡은 빌라에 연세(年稅)로 들어간 화자가 고장난 수도와, 떨어지는 타일 등속을 고쳐달라고 요구하지만 여자는 나몰라라 하고 심지어 연락까지 차단하며 정 불만스러우면 나가라고 배짱을 부린다. 알고 보니 여자도 제주로 내려와 오래된 빌라 하나 장만했지만 고독하긴 마찬가지인 처지다. 말미에 '연수'가 부여잡은 마음 자락.
-내일은 밤도깨비 같은 여자가 사는 삼층에 해물 넉넉히 넣은 김치전이라도 한 접시 들고 올라가봐야겠다고 연수는 생각했다.
표제작 '파문'의 연민은 결이 다르다. 이해는 하되 끝까지 품기에는 버거운 존재도 있다. '기찬'은 노조 활동을 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 당시 검붉은 점이 있던 조교는 악마처럼 굴었다. 조교의 몽둥이질을 피해 죽지 않으려면 기어가야 했다. '붙어 있는지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른 채 흙바닥을 긁은 손가락 두 개는 밤 내내 통증이 되었다. 의사 앞에 갔을 때는 이미 썩은 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기찬은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사회에 나와 해고된 공장 앞에서 치킨집도 열었지만 결과적으로 노조 와해세력에게 공간을 제공하면서 '가해자'가 돼버렸고, 낭인처럼 경륜장을 배회하는 현재의 삶이다. 이 경륜장에서 '붉은 점'의 조교를 만났지만, 녀석은 모르는 눈치. 기찬은 이 놈 주변을 배회하다 컵라면 하나 던져주며 손가락을 드러낸다.
"참 짠하잖아요. 한 발 물러서서 가만히 응시하면 조금 더 이해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있어요. 글을 쓸 때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 사람을 가르는 어떤 경계에 대해서 생각이 참 많거든요. 상식적이고 명백한 가해와 피해도 있지만, 나에게 이득이거나 유리하면 내 편 좋은 사람이고 불리하면 나쁜 사람이 되어서 해를 끼치기도 하잖아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조금 더 마음이나 상황을 들여다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집의 조건'은 성실한 노동만으로는 '집'을 구하기 어려운 세태를 핍진하게 파고든 미덕을 지닌 단편이지만, 돈에 눈먼 이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부동산업계에서 중개인으로 종사하면서도 사람의 '선함'을 믿는다는 왕년의 노동운동 동지 '선희' 이야기가 더 눈에 밟힌다. 어렵사리 돈을 모아 집을 사기 직전 순식간에 올라버린 집값에 망연자실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속을 달래기 위해 훌쩍 선희의 시골집을 찾아간 영주는 선희의 말에 놀라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선희의 믿음은 타인이 아닌 선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자신을 믿기 어려워질 때 사람의 근원을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잠 설치고 일어난 아침, 불현듯 선희네로 달려온 것은 어떤 경우에도 놓지 않아야 할 신념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담아낸 두 편 '엄마의 빛'과 '그기 머라꼬'에는 평생 고생을 하며 자녀들을 건사해낸 엄마의 삶이 펼쳐진다. 아들을 얻기 위해 딸 이름에 사내 남(男)자를 넣어가면서 6남매를 낳은 엄마, 평생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살았던 그 엄마에게서도 '빛'을 발견하는 작가의 시선은 애틋하다. 장남수는 '엄마가 아픈 무릎으로 종종거리며 제사 음식을 사다 나르고, 지성껏 상을 차리고, 몰려드는 친척들에게 떡 봉지를 들려 보내고, 자식의 안위를 챙기느라 분주한 순간마다 얼굴에 서렸던 빛, 엄마의 방식으로 화사해지던 빛이었다'고 썼다. 딸이 해고노동자로 감옥에 가던 때를 회고하는 엄마의 구술.
-유리 앞에서 니가 여기는 밥도 제때 잘 주고 책도 실컷 읽을 수 있고 야근도 안해서 잠도 실컷 잔다고, 걱정 말라꼬 그리 당돌한 소리를 한 기 내 안 잊힌다. …내도 니 아부지가 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시상 천지 단단하고 잘난 사람이 자식 앞에서는 그리 약해지더라. 아이구, 속은 여려터진 인사, 저승에서는 잘 사는지 모르겠다. 니는 그때는 에미 애비 억장 무너지는데도 상글상글 웃더만 와 이제 우노?
"무능하고 가난한 남자를 만나 험난한 시대를 헤쳐온 할머니와 엄마와 딸에 이르는 삼대 이야기도 나중에 소설로 써보고 싶어요. 어차피 지식인층이나 상류층 이야기는 못 써요.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와 이웃의 말을 이렇게 작은 소리로라도 조곤조곤 꺼내는, 그런 정도죠. 동료들의 구술을 정리하면서 자신들보다 더 속마음을 잘 표현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마다 굉장히 뭉클하고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를 얻곤 했어요. 이제 그들 이야기를 소설 형태로 담아서 부지런히 조금씩 써보자는 마음인 거죠."
소설가 장남수가 걸어왔고 서 있는 자리는 분명 귀한 입지일 터이다. 그는 그곳에서 "소설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치밀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서 "되지도 않을 허영이나 허명에 기웃대지 않는 우직함이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이 나이에 비로소 깨닫는다"고 다짐한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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