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 일어나는 구체적인 과정 세밀하게 묘사
SF와 순문학, 장르 간 자유롭게 오가며 집필
"소설이 무거워진 건 세상이 가볍지 않기 때문"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예전 냉전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다시 대결 국면으로 돌아서면서 전쟁 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데 실제로 사람들은 예전 냉전 시절만큼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잘 모르면서 TV 너머로 본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는 느낌이 있어요."
최근 출간된 임성순의 두 번째 소설집 '환영의 방주'(은행나무)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아슬아슬한 논리를 곱씹어 보게 한다. 표제작은 핵탄두 200기를 장착한 잠수함이 적의 항구까지 접근해 미사일 발사 기지를 향해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하는 이야기다.
통신관이 사령부에서 내려온 암호화된 전문을 함장에게 내밀었다. 내용은 '작계 5019.' 이 작계는 전면전을 가정하고 개전 동시에 선제적인 화력 투사로 적의 핵무기 투사 능력을 일시에 무려화시키는 작전이었다. 과연 이 잠수함은 적이 보복 핵미사일을 날리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제압했을까. 이 소설이 핵전쟁을 다룬 많은 영화나 소설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핵 공격의 절차와 결과를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임성순을 광화문에서 만났다.
"이 단편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가장 늦게 지난해 9월 완성했습니다. 이즈음 분위기가 많이 반영됐지요. 핵이 그렇게 쉽게 말할 대상이 아닌데도 너무 함부로들 말하는 것 같습니다. 피상적인 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핵 위협에 대해서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핵전력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서 실제적으로 쓰려고 했고, 그게 정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훨씬 무거운 문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7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표제작 외에도 SF와 이른바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들을 선보이고 있다. 임성순 특유의 치밀한 디테일 위에 사유의 힘을 보태는 SF들이 먼저 눈에 띈다. '타이탄의 날'과 'made in heaven'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인간형에 대한 사유와 함께 인간이라는 종의 스러지지 않는 탐욕을 드러내 보인다.
-팩토리에서 생산된 육체를 장기 보존액에 넣은 채 완충용 컨테이너에 밀봉해 몸만 보내는 겁니다. 의식이 없고, 생명 활동도 없는 그야말로 고깃덩이를 보존액에 넣어 보내는 탓에 매스드라이버의 가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생명 활동은 이곳에 도착한 후 시작됩니다. 도착 즉시 신체의 순환계가 작동하고 위성 중계로 지구에서 의식을 송신해 다운로드하는 거죠. 일을 마치면 이곳의 기억만을 다시 지구로 송신하고 육체는 폐기됩니다. 업로드가 끝나면 이 몸은 식물 플랜트의 새로운 퇴비가 되는 거죠.
새로운 우주 개척시대의 인간형은 우주에 적응 가능한 휴머노이드다. '타이탄의 날'은 새로운 우주형 존재가 37년 만에 우주 외곽 기지에 도착해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보험 약관을 들이미는 이야기다. 모두 살아남을 수도 있었는데 우주의 제한된 환경에서조차 탐욕으로 인해 망가지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탐욕이라는 게 생존을 위해서 발달시킨 본능 중 하나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탐욕이라는 게 인간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주의 세기가 도래해서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게 돼도 그 세계의 자원이라는 게 제한적일 텐데, 그런 상황에서 탐욕을 그대로 가지고 인류가 더 나은 단계로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인 거죠."
'made in heaven'에서는 죽은 뒤 뇌를 스캔해 '천국'에서 살아갈 자격을 돈 주고 사는 시스템을 설정, 과연 육신과 분리된 본질적인 존재가 성립 가능하지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 뇌를 스캔해 기억을, 정신을 살려놓는다고 해도 섬세한 신경들이 퍼져 있는 인간 본래의 육신과 결합되지 않는 한 인격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설혹 분리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는 자본의 상품으로 다시 이용되고 말 것이라는 디스토피아 서사다.
'들림 받은 자들'은 지독한 역설을 통해 작금의 인간들 행태를 풍자하는 단편이다. 예언자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유튜버는 말한다.
-정의를 말하지만 증오밖에 모르는 독을 품은 자들, 윤리를 말하지만 진정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 선을 말하지만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 선인지도 모르는 자들, 그런 자들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이길까요? 아닙니다! 오는 새벽을 막을 수 없듯, 새 시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란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이 유튜버는 인간의 존재 이유가 다름 아닌 지구를 '테라포밍'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언자에게 계시받은 테라포밍이란 '우주 개척 중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그 환경을 변화시켜 새로운 생태계와 자연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탐욕으로 환경은 망가질 텐데 그 탐욕은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이므로 인류는 창조주가 지구를 '테라포밍'하기 위해 심어놓은 존재들이라는 논리다. 구독과 조회수를 강조하며 유튜버는 말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지구 내의 기존 생명체를 멸절시키고 우리의 창조주들의 고향별과 같은 환경으로 지구를 바꾸는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지구 환경을 부적절하게 바꾸며, 다른 생명체를 죽이며 번성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지구의 생명체들에게 내려진 일종의 내용증명이자, 퇴거 명령서였던 겁니다. 궤변이라고요? 아니요. 진짜 궤변은 이런 거짓말들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고작 발코니에 태양열 전지판을 하나 세워놓는 것 정도로 전기차를 타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 말하는 것이 진짜 궤변이죠.
'히카리'는 '리얼돌'을 데리고 여행하는 사내를 등장시킨 단편이다. 사내는 지나치게 비대한 몸집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당한 인물로 '보면 불쾌한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다. 실리콘벨리에서 암호화폐까지 설계했지만, 그는 돌아와 여전히 가상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처지다.
이 캐릭터는 임성순이 실제로 일본 여행에서 목격한 인물을 참고해 만들었다. 번아웃이 와서 코로나19가 엄습하기 직전인 2019년 9월부터 3개월 넘게 모스크바에서부터 스페인까지 유럽을 오토바이로 횡단했는데, 그 예행연습으로 일본에 먼저 건너가 캠핑 장비를 싣고 다니다가 만난 인물이다. 소설 속 실제 인간 같은 리얼돌의 이름은 '히카리', 곧 빛이라는 명명인데 임성순은 "가상이 실재를 지배하는 방식은 픽션이나 상상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고 썼다.
임성순은 세계문학상(2010)에 장편 '컨설턴트'가 당선된 이래 '문근영은 위험해' '자기 개발의 정석' '극해' '우로보로스' 등을 펴냈고, 이번 신간은 2018년 출간한 첫 소설집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포식자들'에 이어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위에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트랜스젠더 여성을 내세워 젊은 날의 실패한 연애를 들여다보는 '퍼스트 제너레이션', 인간을 소모품으로 몰아가는 자본의 속성을 드러낸 '번아웃'이 수록됐다. 하나의 빛깔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장르와 인물들이 지배한다. 그는 이른바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타일이다.
"장르를 청탁받으면 최대한 그 성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죠. 장르마다 줄 수 있는 즐거움과 미덕이 있거든요. 최대한 충실하게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워가는 과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실험도 많이 해보려고 하죠. 궁극에는 19세기 러시아 장편 소설처럼 길고, 인간사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품을 써내고 싶습니다."
자본과 협업의 한계를 지닌 영화보다는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소설이 좋다는 임성순은 자신이 집필한 '공조2'가 지난해 흥행에 성공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올 4월에는 출세작 '컨설턴트'가 영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가볍게 출발한 것치고 꽤 결과물이 무거워진 것은 아마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가볍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작가노트에 썼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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