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군사 블로거들, '미사일 피격은 장병 휴대폰 보안위반 탓'에 분노
"500~600명 수용 숙소 건물 지하에 탄약고…무사안일 책임자 처벌" 모스크바 시간으로 지난 1일 0시 1분쯤, 도네츠크 지역의 한 막사에서 잠을 자던 러시아군 신병의 5분의 1 가량이 몰살을 당했다. '마키이우카의 비극'이다.
비극이 시작되기 불과 10여분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신년 맞이 자정 연설을 하던 중이었다. 소셜 미디어에 유포된 확인되지 않은 영상에는 당시 푸틴 대통령의 자정 연설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미사일이 주변을 강타할 때 몸을 숨기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담겼다.
러시아 국방부는 4일(현지시간) 세르게이 세브류코프 중장 명의 성명에서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도네츠크주 마키이우카의 신병 임시숙소에서 연대 부사령관인 바추린 중령을 포함한 총 89명의 장병이 숨졌다고 밝혔다.
앞서 러시아 국방부는 피격 36시간이 지나서야 사망자가 63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브류코프 장군은 "안타깝게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사망자한 동지의 수가 늘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사망자가 최대 4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러 국방부 "비극의 원인은 '장병들의 휴대폰 보안 위반 탓'"
러시아 국민들은 분노했다. 사망자 숫자가 더 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피격의 원인을 '장병들의 휴대폰 보안 위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앞서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2일(현지시간) "이 비극은 장병들이 휴대전화 금지 수칙을 어기고 상대방 무기 사거리 안에서 전원을 켜고 대량으로 사용한 것이 원인"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 등 친정부 성향 매체들은 군 소식통을 인용해 "일단 하이마스(HIMARS,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 공격의 원인은 도착한 신병들이 휴대전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적(敵)은 에셜론(ECHELON) 첩보 시스템을 사용해 이동통신 활동과 가입자 위치를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에셜론은 미국-캐나다-영국-호주-뉴질랜드 등 이른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국가들이 운용하는 국제 통신 감청 및 신호정보 수집 분석 네트워크를 말한다.
이날도 세브류코프 중장은 "이 비극은 장병들이 휴대전화 금지 수칙을 어기고 상대방의 무기 사거리 안에서 전원을 켜고 대량으로 사용한 것이 주 원인"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로 인해 적군이 우리 병사들의 위치를 추적하고 타격 좌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이번과 같은 일이 향후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조치를 취할 것"이며 "책임을 져야 할 공직자들은 처벌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제공한 하이마스 유도탄으로, 미국이 찍어준 준 위치 정보 좌표의 숙소 공격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하이마스에서 미사일이 발사됐고, 이 가운데 격추된 2발을 제외한 나머지 4발이 임시숙소를 타격해 건물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미국이 제공한 하이마스 유도탄으로, 미국이 찍어준 준 위치 정보 좌표의 숙소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숙소 건물 지하의 탄약고가 피해를 키웠다는 정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러시아군은 도네츠크 드루주키우카 기차역 인근에 보복 공습을 감행해 우크라이나군 병력 최대 400명이 사망하고 하이마스 발사대 4대가 격파됐다고 주장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러시아군 사망자가 최대 400명에 이른다는 우크라이나 측 주장에 대응한 '선전'으로 보인다.
키릴로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차장은 전날 드루주키우카 일대가 공격을 받아 아이스하키장이 파괴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만 전했다. 이 또한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앞서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지난 2일 텔레그램에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2022년의 결과"라며 "작년 한 해 동안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 병사 10만명 이상을 사살하고 4만2천여개의 러시아 폭발 장치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작년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의 40%를 해방했으며, 2014년부터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의 28%를 회복했다고 밝혔다.
일부 정치인 "병사를 한 곳에 몰아 놓은 것은 지휘관"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당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러시아 연방 평의회 의장인 세르게이 미로노프는 텔레그램에서 피격의 배후에 "배신 또는 형사과실"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가 필요하고, 책임자를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이 메드베데프 모스크바 지역의회 부의장도 텔레그램에서 "사건에 대해 지휘관이 아니라 일선 병사들 탓을 할 줄 알았다"면서 "병사를 한 곳에 몰아 놓은 것은 지휘관"이라고 수뇌부를 비판했다.
그는 "문제에 대해 침묵한 사람들, 사망한 병사들에게 탓을 돌리려 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사는 분명히 기록해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러시아의 군사 관련 블로거들이 군에 대한 비판을 주도하고 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러시아의 용병기업 와그너(Wagner) 그룹과 연결된 블로거 그레이 존(Gray Zone)은 텔레그램 채널에서 "예상대로 책임을 동원된 병사들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했다"면서 포격에 취약한 건물에 500명의 군인을 수용한 것에 대해 지휘관을 비난했다.
앞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장교 출신인 이고르 기르킨은 텔레그램에서 직업학교 건물은 신병 600명의 임시 숙소로 쓰던 곳인데 탄약이 보관돼 있어 "사상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군사적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탄약과 군사 장비가 건물에 보관돼 있어 폭발력이 커졌다며 "러시아가 하이마스 미사일의 사정권에 인력과 장비를 함께 배치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피격 장소가 신병 막사인 점과 군 당국의 무사안일에 불안·분노
이번 사건이 1차적으로 러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민을 분노하게 한 것은 공격을 당한 곳이 신병 막사인 점이다.
이는 러시아의 징병 대상 청년들에게 '나도 전선에 끌려가면 저렇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런 불안감은 입영을 앞둔 자식을 둔 모든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희생된 병력은 동원령으로 징병된 신병들이었으며, 출신 지역은 대부분 모스크바로부터 동남쪽으로 각각 800여km, 1000여km 떨어진 사라토프(Saratov)와 사마라(Samara) 주였다.
노출된 3층짜리 직업 학교 건물을 500~600명의 신병 숙소로 사용한 군 당국의 무사안일도 군사 블로거와 국민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블로거들에 따르면 건물 지하의 탄약고에는 탄약이 보관돼 있었다. 하이마스 사정권 안의 신병 숙소에 발화성 물질까지 차 있었던 셈이다.
그 시각 푸틴 대통령은 군인들을 배경대로 세워놓고 '러시아 시민에게 보내는 새해 연설'을 했다. 9분가량의 연설 동영상은 러시아 대통령실 누리집에 12월 31일 23시55분에 게시했다.
푸틴은 배경대로 들러리를 선 군인들과 함께 새해 축하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는 군인들과 샴페인을 마시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서방에 맞서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연설의 마지막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진정한 영웅을 키운 부모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한다"면서 전사한 군인 가족에게 큰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연설을 담은 동영상이 대통령실 누리집에 게시된 지 5분 뒤에 우크라이나 모처에서 6연발 하이마스 미사일이 발사됐다. 그중 4발이 자정을 막 넘긴 1일 0시 1분에 마키이우카의 신병 숙소를 타격했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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