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는 보이는 것과 숨겨지는 것의 하모니를 찾는 게 핵심"
식사 시간 외엔 작업실서 두문불출...1000여 점의 작품 빼곡 "남자는 포승에 묶인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누운 아트지의 사방, 네 귀와 중앙을 매섭게 훑는다. 시간이 다다르자, 그의 가지런하던 손끝은 일몰의 태양이 바닷속으로 빠져들 듯 한순간 물감에 뛰어든다. 잠시 후 물감에서 빠져나온 손끝은 빙판처럼 미끄러운 아트지 위를 위험하게 휘몰아친다.아트지는 저항하지만 찰나를 포착한 화백은 기세를 몰아 일필로 숨통을 끊어놓는다."
화백 이안리는 여타 작가와 달리 아트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그의 붓은 손가락과 팔등, 더러는 손톱이다. 아트지 위를 수만 번 내달리 그의 지문은 아예 달아버렸다.
"나는 작가와 종이 사이를 갈라놓는 붓이 싫어 신체를 사용한다. 먹도 묵향은 좋지만, 화선지에 실루엣처럼 번지는 전통적인 방식(농담)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트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미끄러지는 아트지 위에 나만의 명암을 만들 수 있다."
그의 그림엔 주저함이 없다. 선이 굵다.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게 사실 맞다. 단번에 휘몰이아 친 화백의 그림 위엔 Jazz의 즉흥성(Improvising)과 경쾌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그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둑에서의 기세와 같다고 한다. "나는 차고 넘치는 기운을 한순간 화폭에 받아내고 있다"며 "그런 기운을 한 번에 담기 위해선 기세야말로 작품의 생명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기세는 한 순간이지만 그는 사실 몰입형 작가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한다. 4년 전 경기도 양평에 마련한 작업실엔 벌써 1000여 점의 작품들이 빼곡히 소장돼 있다. 2015년부터 다시 그림을 시작했다 해도 그 수는 적지 않다. 만점을 남겼다는 피카소의 기세가 부럽지 않다.
그는 미발표작들을 하나씩 넘기면서 말을 잇는다. "발표할 겨를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이 많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다음 단계의 씨알이 되니 나쁠 거 없다"고 했다.
그는 애초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미대를 졸업한 아버지 이종학은 서양화가다. 아버지는 작고 몇 해 전인 2010년 '이동훈 미술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는1963년 현대문학상 '시부문'에 수상한 등단작가이기도 하다. 이 화백은 "비타협적이며 비사교적인 분이었다"고 회고하며 "나는 친절하지 않은 작가였다"는 말로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고백했다. 고무적인 대목은 요사이들어 작품의 실마리를 글로 푸는 친절을 베푼다는 점이다.
"사실 평론가들은 작가가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언어로 작품을 제한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짧은 문자적 기술로 또 다른 영감을 자극하거나 실마리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추상화가다. "구상을 보면 대강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지만, 비구상에 속하는 추상화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추상화는 이면의 감흥까지 시각화하는 것이 중요해요. 보이는 것과 숨겨지는 것의 하모니를 찾는 게 핵심이죠." 단번에 그림을 그리지만 그가 많은 시간 작업실에 스스로 갇혀 세월을 낚는 이유다.
그는 그런 하모니를 위해 자주 먹을 사용한다. 일필로 그린 흑백의 조화는 동양의 수묵과는 전혀 다른 생명력이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전작들과 달리 원색도 자주 등장해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작품을 단색화라고 단정하지만 나는 그동안 색에 제한을 둔 적이 없다. 흐르는 감정을 일순간에 받아내는 것이 나의 방식이기에 다양한 색상도 그것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로 가능하다."
20대에 처음 전시회를 열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2015년 후다. 늦깎이 화가인 셈이다. "세상을 알만한 나이가 돼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한다. 어린시절 넘쳐나는 그림들과 전시회 팸플릿에 둘러싸여 살았고 더러 아버지의 호출을 받아 캔버스 바닥을 칠하기도 했으니 그는 자연스레 화가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술 대신 아들을 경영학도로 내몰았다. 그는 나중에 금융맨, 사업가로 살아야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사방 방향도 모르고 헤매던 그 시절, 미국에 사는 친구는 "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라며 잠자던 꿈을 건드렸다. 한때 예술가를 꿈꿔 전시회를 열며 부산을 떨기도 했지만 그의 뇌리엔 '다시 칼같이 날카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의구심은 그를 주저하게 했다. 친구의 연이은 채근에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 집안에 재료를 들였고 한동안 주변을 서성거려야 했다.
친구는 아예 '이안리(Ian Lee)'란 작가명까지 만들어 작가의 길로 내몰았다. 나중에 친구 손에 쥔 그의 작품 포트폴리오는 뉴욕의 여러 갤러리에 소개됐고 나중에 뉴욕 스쿱, 마이애미 등 국내외 유명 갤러리나 아트페어 수십 회 나설 수 있게 됐다. 특히 2019 열린 '신체의 회화, 회화의 신체' 전시회엔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로 꼽는 이건용(80)과 함께 전시를 할 수 있었다.
이 화백의 작품은 아버지의 것을 꽤 닮아있다. 주제나 형식, 색상은 전혀 다르지만, 맥박은 같다. "아버지는 동기생들보다 조명이 덜됐다. 비타협이고 비사교적인 탓이다. 상업갤러리와도 인연이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늦었지만 아버지의 작품들이 다시 조명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가 완고하고 비타협적이던 아버지의 그것을 넘나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으니 무리도 아닐 터다. 작가가 작업실을 공개하는 것은 본디 쉬운 일이 아니다. 속곳을 모두 보여야 하니 여러가지로 난감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이 화백은 내친김에 여러 곳간을 열어 저간의 활동을 설명했다. 덕분에 아버지 이종학 선생의 작품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살갑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같은 맥박. 그는 부친의 유작을 꺼내보이는 것으로 서투른 그리움을 대신하는 듯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아트지는 인쇄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종이다. 흔히 주변에서 보는 달력을 만들 때 사용하는 종이라고 보면 맞다. 그는 1년 365일 달력을 채우듯이 아트지 위를 쉼 없이 내달리고 있다. 안에 찬 감성이 넘칠 때마다 그는 혼신으로 토해내고 있다. 그의 작업은 더이상 토해낼 것이 없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가 수많은 날 아트지 위에 던지는 메시지를 무엇일까. 산길을 내려올 때쯤 그가 던지는 화두가 어쩌면 달력처럼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KPI뉴스 / 제이슨 임 아트전문기자 jasonyim@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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