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는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2-12-02 14:18:50
산문집 '진지하면 반칙이다' 펴낸 류근 시인
4년 간 SNS에 올린 장르 경계를 넘어선 글들
뜨거운 연애감정과 현실에 대한 날선 언어 공존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사랑인가"
풍자만 있으면 서늘해지고 해학만 있으면 느슨해진다. 그래서 둘의 효용성을 활용해서 상황에 맞게 대상이나 세태를 어루만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마당극이나 탈춤의 대사들, 판소리 대사들엔 항상 풍자와 해학이 왼발 오른발처럼 따라붙는다. 풍자와 해학은 약자들의 장르인 것이다. 진지하고 엄숙하고 근엄한 인간 중에 제대로 뭔가 이룬 놈 본 적 있는가. _'진지하면 반칙이다'

▲페이스북 스타로 각광받아온 류근 시인.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넘어선 '류근이라는 장르'가 펼쳐지는 산문집을 새로 펴냈다. [이해선]

류근 시인이 지난 4년 간 세상과 소통한 짧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진지하면 반칙이다'(해냄)는 일찍이 소설가 이외수가 운문을 뛰어넘고 산문을 뛰어넘는 '류근이라는 장르'라고 상찬했던, 감성과 위트와 날선 비판이 고루 담긴 글들로 채워졌다. 여전히 식지 않은 연애 감정으로 가슴 뛰게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동네 아저씨의 충고가 있고, 위정자들을 향한 날선 비판이 예리하게 충전돼 있다.

류근이 자주 고백하거니와 이 글들을 쓰는 전후에는 늘 술이 따라다닌다. 오후에 식당에서 만나자는 청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전화로 그를 만났다. 오후에 만나면 술을 마실 테고, 술을 마시다보면 효율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전달하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섰다. 그는 "아침부터 술 생각이 나는 날은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직 아픈 사람"이라고 썼다.

술에 취하면 구스타프 클림트 구도로 목이 꺾이는 여자는 월요일이니까 그냥 돈이나 벌게 두고, 나는 혼자서만 옛날 시를 소리 내어 읽어야지. 오뎅이 다 부풀어서 지구를 비좁게 할 때까지 읽어야지. 그러면 이 아침의 술친구들은 비로소 꾸벅꾸벅 졸면서 꿈을 꾸기 시작하리. 염소는 염소의 꿈을 꾸고, 붉은 닭은 붉은 닭의 꿈을 꾸고, 가물치는 연못의 꿈을 꾸고, 만년필은 종이의 꿈을 꾸고, 노새는 등짐의 꿈을 꾸리. 나는 더 오래오래 시를 읽으리. _'아침부터 술 생각'


-어제 마신 술은 좀 깼는가.
"아침에도 마셨고, 지금도 마시고 있다. 숫기가 없어서 술기로 버티는 중이다."

-등단 30년차 시인이면 정신적인 맷집도 탄탄해졌을 법한데 여전히 숫기가 없는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그냥 술기로 버티는 거다. 진짜 외롭고 고독하다. 당신도 고독하지 않은가?"

-페이스북 친구들도 많고, 늘 자랑하듯 아름다운 애인들도 끊이지 않는 듯 한데 왜 그리 외로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들도 다 고독한 존재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왜 그런가.

"부끄러워서…"

-부끄러운 데도 세상에 할 말은 다하는가.

"부끄러우니까, 부끄러우니까 할 말을 하는 거다."

-할 말을 하기 위해서 또 술을 마시는가.
"그런 것이다."

나는 고고하고 도도하게 살지 못하는 삶이 갑자기 너무나 부끄러워져서 또 술을 마셨다. 그사이에 꽃들은 피고 졌다. 애인들은 새로운 연애에 성공하거나 실패했다. 죽은 자들은 진짜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의 시를 진심으로 읽어주지 않았다. 좌표를 잘못 찍어서 엉뚱한 궤도를 맴돌고 있는 지구답게 나를 태우고도 어떠한 자의식도 없어 보이는 지구의 나날을 나는 슬슬 견디었다. _'그것참 다행 아닌가'

▲류근 시인은 "예술가의 숙명은 일류가 아니면 삼류"라고 말한다. [이해선] 

류근은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상처적 체질' '어떻게든 이별'을 펴냈고,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자로도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이즈음은 자주 '자퇴한 시인'이라고 농담을 하지만, 사실 그는 방송에서도 활약했고 페이스북에서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는 셀럽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포스팅을 하면 여러 매체에서 즉각 기사로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는 정작 자신은 '삼류'의 본류라고 자처한다.

나는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을 자처했다. 나의 삼류가 시인을 구속하는 것인지 연애를 구속하는 것인지 통속과 트로트를 구속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삼류라고 말하자 그냥 삼류라고 믿어주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삼류여서 퍽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들 대부분은 일류도 이류도 삼류도 아닌 아류들이었다. 나는 참 속으로 그들을 몹시도 측은히 여기면서 경멸했다. _'그리운 삼류'

-일류도 이류도 아닌 아류들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썼는데, 그 아류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인가.
"일류는 천의무봉한 존재들이다. 일류들이 200년 사이에 몇 명쯤 있었을까 생각보면 한 5명 정도는 될 것 같다. 나머지는 다 아류들이다. 그들이 권력을 형성하고 일류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그냥 삼류 본좌다."

-일류는 세상을 바꾸는 존재들이고, 이류는 세상을 지탱하는 존재라고 했다. 삼류는 '딴따라' 광대인가. 
"굳이 딴따라라고 말하면 막 다들 싫어할 테니까, 류근 같이 그냥 아무 때나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 (아무 때나 울고 스스로 망가짐으로써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 그렇다. 그게 삼류다. 진짜 다들 삼류가 됐으면 좋겠다. 예술가의 운명은 일류가 아니면 삼류다."

-제대로 삼류가 될 수 있는 예술가도 흔치 않을 것 같다.
"그렇다. 삼류의 본류가 돼야 하는데, 제일 싫어하는 게 아류다. 삼류가 될 바에는 본류가 돼야지."

-삼류의 본류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류근처럼 돈을 벌 때 돈을 벌고, 시 쓸 때 시를 쓰고, 이런 말은 진부하지만 연애할 때 연애하고 그냥 곧장 그 길로 가는 거다. 거기서 끝장을 보는 거다. 그냥 거기서 죽어도 좋아, 그게 삼류 정신이다."

'페이스북 프린스'라는 별칭이 따라다닐 만큼 류근 시인은 SNS에서 각광받는 존재다. 그는 10년 전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우연히 후배들이 SNS를 권유해 그들끼리만 노는 데인 줄 알고 편하게 농담을 올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시작해 지금의 세계가 펼쳐졌다고 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다른 마당으로 옮겨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SNS 세계는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어서, 설화에 휩쓸리고 생각이 다른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치와 정치인들에 시선이 자꾸 머물게 되었다. 내 문장은 점점 더 졸렬해지고 경박해지고 천박해지기 시작했다. 권력의 속성이 본디 욕망과 과대망상의 철로 위를 달리는 전차 같은 것인데 거기 기찻길 옆에서 온갖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악다구니를 치다 보니 내 세계관마저 시나브로 축소되고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속물화되고 만 것이다. 반성한다. 풍자와 해학을 빙자해서 주로 조롱과 조소와 야유를 일삼았다. 은유와 상징의 칼을 버리고 저자의 비린 직설과 타협했다. 자퇴한 시인이라지만, 시를 배우고 살아낸 자에게 그것은 타락이고 죽음이다. _'아무 때나 휘파람을 불었구나'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는 뜨거운 연애 감정이 류근의 글에는 도도하다. [이해선] 

-할 말을 다 하다 보면 피폐해지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터인데, 이번 책에는 '반성문'도 보인다.
"너무 슬프게도 할 말을 하다 보니 문장이 졸렬해진다. 대중이 알아들을 만한 수준으로 말을 하다 보니 그러한데, 사실 부끄럽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시인이니까. 시인만한 정신적인 부자가 어디 있는가. 다만 시인의 자세에서 비켜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주 돌아볼 따름이다. 피카소는 회화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적과 대항하는 전쟁의 도구라고 했다."

얼굴만 떠올려도, 이름만 떠올려도, 그 어깨만, 그 손길만, 그 뒷모습만, 하여간 그 향기만 떠올려도 가슴에 전기 먹은 송사리 같은 슬픔이 느껴지지 않거든 사랑 아닌 줄 알아라. 사랑하면 슬프다. 진정으로 슬퍼진다. _'사랑 아닌 줄 알아라'

-현실을 직격하는 언어들과 뜨거운 연애 감정이 공존한다.
"전기 먹은 송사리 같은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사랑이겠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나.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고백할 수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늘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이라니, 얼마나 행복한가.
"아니다. 행복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건 고독한 거다. 내 사랑은 인류 보편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 예술가의 숙명, 시인의 숙명이다."

말미에 그는 다시 한 번 애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세월에 닳지 않는 시인의 타고난 감성, 느껍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 푸른 술잔에도 있고, 내 손등 위에도 있고, 창밖의 고단한 빗방울에도 있고, 늙은 가수의 목소리에도 있고, 발등에 툭 떨어진 눈물에도 있고, 천천히 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있네. 이름만 봐도 울고 싶어지는, 이름만 봐도 서둘러 정거장에 나아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이름이 있다. 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이 있다. _'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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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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